작가라는 꿈이 너무나 아득하게 여겨지던 학부 시절이 끝나갈 무렵,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되었다.
지방대 국문학과 졸업생한테 취업은 남의 나라 얘기였지만, 계속 부모한테 신세 질 수는 없었기에 그나마 전공을 살릴 수 있는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다. 하지만 역시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학부를 졸업한 것도 모자라 대학원까지 가서 무슨 소용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시각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지만, 몇 달 동안 설득과 회유를 거쳐 부모님의 마음을 돌렸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작가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대학원에 간 건 아니다. 그랬다면 차라리 문예창작과에 들어가거나 아카데미에서 창작 수업을 받는 것이 더 현실적이지 않았을까. 대신 편집자라는 새로운 꿈을 품에 안고 혹독한 대학원 생활을 버텼다.
대학원에 입학한 뒤, 담당 교수님과의 첫 면담 때 이런 얘길 들었다.
“우리 학교 수업이랑 학생들 만만치 않을 텐데 잘 따라올 수 있겠니?”
물론 타지에서 올라와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만 하는 타대생에 대한 걱정도 섞여 있었겠지만, 한편으론 ‘네가 앞으로 몸담을 학교가 졸업한 학교랑은 수준 차이가 많이 날 것이다.’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었다.
‘저도 당당하게 면접 보고 들어왔는데요. 그리고 교수님 판단이 틀렸다는 걸 반드시 실력으로 보여드릴게요.’
오기와 서러움을 자양분 삼아 난 더욱 강해졌고, 수많은 고비를 넘기며 틈틈이 취업의 기회만 엿보았다.
그러나 편집자의 길도 만만치 않다는 걸, 문단만큼은 아니지만, 이곳에도 학연이나 지연의 뿌리가 깊이 박혀 있다는 걸 시간이 지날수록 실감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평소에 일하고 싶었던 어느 출판사에 지원한 적이 있는데, 지원서 항목 중 ‘자사와 관련해 아는 사람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편집자를 뽑는데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거지?’
당연히 그곳엔 서류부터 탈락했다. 워낙 경쟁이 높은 곳이라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왜 지연이 필요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출판사와 관련된 또 다른 일화가 있다.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여기저기 원서를 넣던 중, 영어 교재 만드는 곳에서 인재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게 되었다.
‘드디어 기회가 오는 건가? 경쟁률이 높긴 하겠지만 그래도 도전해 보자.’
다행히 1차 서류에 합격한 뒤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여느 회사와 다름없는 면접을 기대하고 갔는데, 담당자가 수십 명의 지원자를 데리고 간 곳은 어느 컴퓨터 실이었다.
‘여기서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속으로 궁금해하자, 담당자는 앞으로 한 시간 정도 컴퓨터로 영어 테스트를 받을 예정이며 통과된 사람만 2차 면접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동안 꾸준히 공부했으니 평소 실력대로 보면 되겠지?’
비록 전공은 아니지만, 독학하면서 틈틈이 번역 일을 해 왔기에 어느 정도 자신 있었다.
시험을 마치고 대기하고 있자 담당자가 합격자들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제발, 신이시여……. 제게 기회를 주소서.’
그 당시 믿지도 않는 신을 애타게 찾으며 기도했다. 나의 간절함이 하늘에 닿았던 걸까. 1차 면접에 무사히 통과한 뒤 2차 면접을 보기 위해 대기실로 향했다. 두근두근. 다들 초조한 표정으로 담당자의 호출만 기다렸다. 이십 분쯤 흘렀을까. 2차 면접은 외국인과의 인터뷰. 어떤 질문을 받을지 예상하며 내 순서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팀별로 나누어져 외국인 면접관이 몇 가지 질문을 던졌고, 돌아가면서 답했다. 살짝 긴장하긴 했지만, 큰 실수 없이 무난하게 답변했던 것 같다. 그러나 외국에서 살거나 공부한 경험을 물었을 때는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
‘호주에서 두 달 공부한 게 다인데…….’
거기다 같은 팀엔 영국 유학 5년 차와 대기업 경력자도 있었다. 우려와는 달리 2차 면접도 통과해 최종 면접을 보게 되었다. 그곳엔 임원진들이 총동원되어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고, 대학원 면접 경험을 되살려 최대한 침착하게 답했다.
그러나 며칠 후에 찾아온 건 불합격 소식이었다. 알고 보니 같은 팀이었던 유학파와 대기업 경력자는 합격했다고 한다. 물론 직종과 밀접하게 관련된 경험이 많은 사람을 뽑는 것이 회사 입장에선 유리할 것이다.
‘그래도 번역과 편집의 섬세함을 살리려면 국문학도가 낫지 않을까? 경험만 좀 더 쌓이면 내가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아쉬움과 함께 야속함이 찾아왔지만,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현재 운영 중인 네이버 블로그
서러움과 고단함, 외로움이라는 3종 세트를 안고 타지 생활을 견디다 보면 가끔 SNS 친구가 위안이 될 때가 있다. 블로그를 통해 인연을 맺은 이웃과는 종종 연락을 주고받다가 직접 만나서 같이 밥을 먹으며 얘기를 나눈 적도 있다.
어느 평일 오전, 수업을 듣기 위해 서둘러 지하철을 타고 학교로 향하는데, 대전에 사는 블로그 이웃한테 문자 메시지가 왔다.
‘오늘 생일이죠? 가족이랑 떨어져 있어서 미역국도 못 먹었겠네요. 잘 챙겨 먹고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고향에 있을 땐 별다른 의미가 없었던 미역국이 타지에서 지내면서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고,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혼자 맞이하는 생일 아침이 어색하고 한편으론 쓸쓸하던 차였다.
노트에 꼼꼼하게 기록하던 일상은 자연스레 블로그로 옮겨갔지만, 처음엔 누군가한테 내 글을 보여준다는 것이 쑥스러워 비공개로 글을 썼다. 그러다 여행 사진을 하나씩 올리기 시작했고, 공감하는 이웃들이 생겨났다. 게시판에 안부를 남기는 이웃부터 관심사를 계속 공유하고 싶다며 서로 이웃을 신청한 분들까지. 그들 중 기억에 남는 친구가 한 명 있다. 그는 법대 학생이었고, 음악과 책에 관심이 많았다. 처음에는 쪽지로 얘기를 주고받다가 어느 날 캠퍼스에 놀러 오라는 제안을 받았다. 마침 가보고 싶던 곳이었기에 선뜻 허락했고, 축제에도 초대받았다. 지금도 가끔 기억난다. 은행잎이 물들기 시작할 무렵, 캠퍼스 안을 돌아다니며 수다를 떨었던 그 시절이. 만일 내가 블로그를 통해 일상을 공유하지 않았더라면, 새로운 친구를 만들고 싶다는 용기를 내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멋진 풍경도, 꿈을 향해 달려가던 멋진 청년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