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거리두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by 은수달


불행에 대한 새로운 의미부여는

우리에게 상처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제공한다.


진짜 내가 된다는 것은 스스로를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목소리와 생각을 존중하는 것이다.


-최광현, 가족의 발견



감정적으로 온전히 거리두기를 할 수 없다면 차라리 비즈니스 관계로 대하자.


올해 초, 가족들과 심적 갈등을 겪으면서 내린 결론이다.




나는 가족형 기업에서 일한다. 가족형 기업이란 가족에 의해 소유 및 경영되는 기업으로, 한국에선 재벌과 관련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중소기업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2세 경영자가 1세를 뛰어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부모가 어렵게 모은 재산을 2세가 한 번에 말아먹는(?) 경우는 많이 보았어도. 아이러니하게도 아들들은 부모한테 물려받은 재산을 당연히 자기 것으로 여기는 반면, 대부분 딸들은 거기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과를 졸업하고 꿋꿋이 나만의 길을 걷던 난 집안에서 돌연변이이자 이방인이었다. 그 당시엔 나처럼 학문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사람도, 물욕이 별로 없었던 사람도 드물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경영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남동생이 부모님 사업을 물려받겠다고 나설 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회사에서 일 년 정도 경험 쌓아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아들한테 하루빨리 사업을 물려주고 싶었던 어머니는 곧바로 회사에 영입했고, 영업부터 가르쳤다.


"사업을 하려면 현장부터 알아야지! 밑바닥부터 시작해!"

현장 총책임자였던 아버지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관리하는 일부터 시켰다. 그리고 아버지 말씀은 옳았다.


어느 날, 3년 동안 일하던 카페가 갑자기 문 닫는 바람에 급하게 구직 자리를 알아보았다. 그러다 학원 몇 군데서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중 나름 조건이 괜찮은 곳에 가기로 결정했는데, 마침 어머니한테서 연락이 왔다.

"우리 회사에 캐드 직원 한 명이 갑자기 그만둔단다. 네가 얼른 배워서 대신해줘야겠다."

"저 며칠 전에 면접보고 왔는데요."

"알아보니 그 일 힘들기만 하고 돈은 안 된다더라. 월급 넉넉하게 줄 테니까 그렇게 하자."


예전에 카페 일을 구했다고 했을 때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카페 창업이라는 명분이 있었다. 그런데... 학원은 현실적인 조건에 맞추어 구한 곳이라, 계속 일할 거라는 보장도, 그럴듯한 명분도 없었다.


그렇게 남들보다 조금 높은 연봉과 차량 지원이라는 당근을 받고 지금 다니는 회사에 들어왔다. 하지만 공사 구분이 안 그래도 안 되는 어머니 성격은 나를 이중으로 힘들게 했다.


퇴근 후에도 수시로 연락 와서 집안일이나 회사일을 지시하거나 의논했고, 주말엔 조카들 핑계로 불러댔으며, 명절이나 휴가철에도 마음 놓고 쉴 수 없었다.


'남들보다 연봉 많이 받으면 뭐해? 5분 대기조 신세인데...'




연초부터 여러 가지 일들을 신경 쓰느라 드디어 번아웃이 오고 말았다. 과민성 대장증후군에 수면장애, 피부 트러블 3종 세트가 날 찾아온 것이다. 마침 연휴가 끼인 날이라 연달아 나흘 쉬려고 했는데, 하필 금요일이 중요한 결제일이라 쉬기도 눈치 보였다.

'어제 중요한 일 대강 마무리했으니, 오늘은 핑계 대고 쉬어 볼까?'


하지만 공식적인 행사가 아니면 쉬고 싶다는 얘길 꺼낼 수 없다. 이럴 땐 반차나 병가를 내고 쉴 수 있는 다른 직원들이 부럽다. 고민 끝에 병명을 들이대며 부장님한테 결근을 보고했다. 사무실에 같이 있을 거라 생각해 사장님한텐 따로 보고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어디? 사무실?"

"집인데요."

"회사 안 갔어?"

"네. 몸이 좀 안 좋아서요."

"그럼 얘길 해야지."

"부장님한테 말씀드렸는데요."


잠시 후, 이번엔 부장님한테 전화가 걸려온다.

"가스 전입신고했어요?"

"아뇨."

"전기세는 냈어요?"

"따로 내라는 말씀 없어서 안 냈는데요."

"그럼 한 게 뭐죠?"

"......"


어제 오후 내내 관공서에 연락해서 전기랑 가스 관련 업무를 봤는데, 본인이 원하는 결과물이 안 나왔다고 한 게 없단다. 괜히 다퉈봤자 남는 게 없을 것 같아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업무 보고를 받은 뒤 도시가스에 연락해서 남은 업무를 처리한다. 그리고 사장님이 지시한 업무를 마친 후에야 잠시 한숨을 돌린다.


가족과 일적으로 얽히면 스트레스도 두 배, 책임감도 두 배이다. 지인 한 명도 결혼 후 장인과 같은 회사에서 일했는데, 마음대로 쉬지도 못하고 늘 일에 대한 부담감에 억눌려 지냈단다. 하지만 허리 디스크에 걸려 일을 그만두고 전부터 본인이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하고 나서야 비로소 새로운 삶을 찾았단다.


나도 지인과 같은 삶을 꿈꾸며 힘들고 치사해도 현실을 견디고 있다. 가족과 거리두기는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숙제이지만,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곪은 상처가 더욱더 깊어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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