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내지 마세요. 무서워요."
성향 차이와 나의 잔소리 때문에 스트레스받던 애삼이가 드디어 속내를 드러냈다.
"혼내는 게 아니라 아니다 싶은 걸 얘기한 거예요."
"가끔 달님이 누나나 엄마 같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약간의 충격이 왔다. 연애하면서 가장 듣기 싫은 말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가깝다는 이유로,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상대한테 무리한 걸 요구하거나 지나치게 간섭하는 걸 누구보다 지양하려고 했는데, 어느 순간 나도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 놀랍고 부끄러웠다.
삼 남매 중 장녀로 자라 누군가를 챙기고 돌보는 것이 익숙한 나와 달리 애삼이는 누나가 있는 막내로 자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의 집착과 기대 때문에 힘들었다고 털어놓은 적 있다. 작년에 독립한 뒤 비로소 자유를 되찾은 것 같다는 말도. 그래서 가능한 애삼이의 자유분방함을 지켜주리라 다짐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모르게 그의 사생활을 간섭하거나 침해하고 있었다.
"애삼이가 TV를 보든 게임을 하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내 일상이 방해받거나 우리 관계가 어긋나는 게 두려울 뿐이에요."
해명처럼 덧붙였지만, 여전히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부분에선 대체로 너그러운 편이다. 마치고 친구들을 만나든, 아는 여자 동생이랑 밥을 먹든, 데이트 비용을 분담하든, 가끔 할 일을 미루든. 그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남사친과 오랜 시간을 보내거나 그에게 무심하게 대할 때 섭섭해하긴 하지만.
"치과 가면 여자들 많은데, 귀엽다고 대시하면 어쩌죠?"
"할 수 없죠."
"질투 안 나요?"
"원래 귀엽게 태어난 걸 어쩌겠어요."
몇 달 만에 치과를 방문하게 된 그와 장난스럽게 나눈 대화다.
장녀의 딸로 태어나 외가에서도 첫 손주였고, 동생들이 분가한 뒤에도 조카들이 줄줄이 태어나 나는 'K 장녀'의 역할에서 하루도 자유로운 적이 없다. 장녀 특유의 책임감과 안정감이 발휘되어 조직에서도 주로 리더가 되거나 관리자 역할을 맡을 때가 많지만, 나도 가끔은 역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지내고 싶다.
"조카들이 얼른 컸으면 좋겠어요. 연휴나 명절마다 불려 가서 돌봐주는 거 그만하고 싶어요."
가족들 앞에선 차마 내뱉지 못한 진심이 그와 얘기하면서 불쑥 튀어나왔다. 애삼이는 그런 날 안쓰러운 표정으로 보더니, 이젠 서서히 벗어날 때가 된 것 같다고 했다.
조카들이 방문할 때마다 겉으론 반가워하면서 속으론 일정 조율하고 챙겨주느라 스트레스받는 엄마. 그런 엄마를 외면하지 못하고 옆에서 같이 스트레스받는 나. 조카들 키우며 일하느라 친정에선 마음 편히 쉬고 싶은 둘째. 그리고 가끔 중요한 행사 때만 얼굴 비추거나 챙겨주면서 비교적 자유로운 막내. 어쩌면 연애에서도 우린 타고난 역할을 재현하느라 상대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