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는다는 건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내가 잊으려고 했던 것은 그가 아니라, 그를 사랑했던 나 자신이었다. 그토록 겁 없이 달려가던 나였다.... 그를 만나지 못해도, 영영 다시는 내 눈앞에 보지 못한다 해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때 그를 떠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츠지 히토나리,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살다 보면 우린 수많은 사람들과 스쳐 지나가거나 때론 의도치 않게 인연을 맺기도 한다.하지만 가끔 이별 후에도 큰 상처나 흔적을 남기는사람도 있다.
불같은 사랑에 빠져 정신 못 차리던 시절이 있었다. 집안의 반대로 헤어진 후에도 서로를 잊지 못해 방황하던 그때가 어쩌면 가장 뜨겁고 순수한 마음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별도 반복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죽을 만큼 힘든 것도 아니다. 눈앞에 닥친 일들을 하다 보면 그럭저럭 살아지고, 어느덧 사랑의 기억도 희미해진다.
가치관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코로나를 계기로 헤어진 연인이 있었다. 한동안 서로에게 미련이 남아 연락하고 지내다 상대한테 연인이 생긴 후 자연스레 멀어졌다. 그리고 같은 모임에서 다시 마주쳤다. 두 달 정도 썸 타다가 한 달 동안의 짧은 교제 끝에 엇갈린 타이밍과 성격 차이로 아프게 보낸 사람도 있다. 세월이 아닌, 정신없이 몰려오는 일이 약이었다. 가끔 생각나긴 했지만, 일부러 연락하진 않았다. 오는 사람은 막아도 가는 사람 붙잡지 말자. 나름의 연애 신조이기 때문이다.
그를 보낸 지 두 달 만에 새로운 인연이 나타났고, 우린 첫눈에 서로가 잘 맞는 상대임을 알아보았다. 전 남자 친구한테 받은 상처들이 애삼이를 만나면서 차츰 옅어져 갔다. 그러다 같은 모임에서 다시 마주친 전남친 A. 서로 자연스럽게 대하자고 약속했기에 우린 티 내지 않고 어른스럽게 행동했다.
"왜 옆에 같이 안 앉고 따로 앉았어요?"
며칠 전, 모임 마치고 다 같이 식사하러 갔는데, 애삼이와 내가 창가에 마주 보고 앉게 된 것이다.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게 중요하니까요. 그리고 옆에 앉으면 얼굴을 잘 못 보잖아요."
"화장실 괜히 갔다 왔네요."
A가 농담처럼 덧붙였지만, 기분이 왠지 묘했다. 애삼이는 모르고, A와 나만 아는 진실.
예전엔 사귀다 헤어지면 그걸로 끝. 친구처럼 편하게 지내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상황이 성향도 바꾸는 걸까. 구남친의 청첩장을 받으며 진심으로 축하 인사를 건네고, 전남친과 마주 보고 앉아 식사도 하며, 때론 다 같이 어울리며 농담도 주고받는다.
그래도 사귈 때 최악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아마 둘 중 하나라도 못되게 굴거나 누군가를 기만했다면 두고두고 기억에 남거나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할지도 모른다.
어느 노래에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했다.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우린 그저 마음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어느 순간 현실을 자각하고 멈추거나 좀 더 성숙해진다. 성장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영원히 피터팬으로 남는 경우도 있다. 사랑 후에 무엇이 남겨지고, 또 무엇을 얻게 될지 사랑을 잃어본 적이 없다면 영영 알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