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같이 일하면서 친해진 여자 동생이 있다. 그녀에겐 사촌 언니가 한 명 있었는데, 조선 시대 사고방식을 가졌으면서도 스스로 신여성이라 믿는(?) 특이한 캐릭터였다.
당시에 썸 타던 남자랑 같이 모텔에 다녀왔는데, 그날 밤 아무 일 없었다며 자랑스럽게 동생 A한테 얘기했단다.
"그 남자 정말 멋있지 않니? 밤새도록 같이 있었는데 날 지켜주더라고."
"언니, 그건 지켜준 게 아니라 언니한테 별다른 매력을 못 느껴서 아닐까요?"
[사진 1] 제주 조천 스위스마을에서
흔히 착한 사람에게는 성적 매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사람은 주로 야성적이고 도도하며 자신감을 뿜어내는 사람인데, 이들의 기질은 착한 사람의 온유함이나 편안함과는 상반되기 때문이다.
-The School of Life, <끌림> 중
그러나 착하고 순진한 것과 수동적인 것은 다르다. 그날 밤, 그 남자가 A의 사촌 언니를 덮치지(?) 않은 것은, 잠자리 이후 복잡해질 관계 때문에 겁을 먹었거나 같이 잘 만큼 매력적이진 않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사촌 언니는 옷차림이 촌스럽고 근자감이 높은 데다 이성한테 쓸데없는 집착(?)이나 요구를 할 때가 많았단다.
나도 한 때는 어른들로부터 강요받은 여성성에 사로잡혀 남자 앞에선 조신하게 보여야 한다는 강박증을 가지고 있었다. 재미없는 상대의 얘기에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공감하는 척하느라 아까운 시간을 낭비했으며, 남성의 보조자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상대를 더욱 빛나게 해야 한다고 착각했다.
주차장까지 걸어 나오는 동안 그는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아주 잠깐 우리의 손끝이 스쳤지만 우리의 눈빛은 마주치지 않았다. 그는 자동차의 운전석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 건 다른 남자애들한테도 흔한 일이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정말 괜찮았다. "통금이 열시라면서? 좀 늦었네." 나는 다소곳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이현, <낭만적 사랑과 사회> 중
부잣집 도련님이 제공하는 안락함을 누리기 위해 주인공은 순진한 척 연기하지만, 그것이 좀처럼 통하지 않는다. 순결하고 도덕적이며 남자 말에 토를 달지 않는 여성은 어쩌면 우리 사회가 만들어 낸, 허구의 인물일지도 모른다.
[사진 2] 전포 카페 로망 34에서
또래의 지인들과 만나 얘기를 하다 보면 어김없이 연애가 도마 위에 오른다. 그중에서도 섹스에 관한 얘기는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며, 같은 세대라도 성 가치관 차이가 많이 난다는 걸 매번 실감한다.
어린 시절부터 자기주장이 강한 편이었던 난 대학 때도 사람들 앞에서 거침없이 내 생각을 표현하곤 했다. 가끔 사랑이나 성에 관한 얘기가 나올 때도 있었는데, 거기에 각자의 판타지를 양념으로 추가하면 그럴듯한 소설 한 편이 완성되곤 했다.
20대 중반에 첫 경험을 치르고 난 뒤 나의 연애관이나 성적 판타지는 전환기를 맞이했다. 거기다 지인들과 솔직하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나조차도 알지 못했던 욕망이나 감정을 마주하게 되었다. 혼란스러웠지만, 충분히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은수 님, 할리우드 마인드네요."
예전에 지인과 함께 '섹스'를 주제로 유튜브 촬영을 한 적 있는데, 그때 그분이 내게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