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멀티 안 되는 내게 업무폭탄 날아든 날

by 은수달


나는 멀티가 안 되는 타입이다. 아니, 그랬다. 지금 사장님을 만나기 전까진.



"거래처에 보낼 거니까 쇼핑백 앞에 명함 예쁘게 붙여라."

출근하자마자 사장님의 지시가 떨어진다. 해마다 명절을 앞두고 주요 업체에 선물을 보내는 것이 연중행사다.


두 번째 임무는 결제. 어음, 현금, 스크랩결제 등 매달 5일은 주요 업체 50여 군데 결제해주고 직원들 월급까지 직접 이체해 준다. 내 월급 내가 보내주는, 이상한 날이기도 하다. 이번엔 연차미사용 지급액까지 더해져서 더욱 바빴다.

"금액이랑 계좌번호 잘 확인해라."

작년 추석 때 상여금 한 건을 잘못 보낸 적 있는데, 잊을 만하면 그걸 상기시켜 주는, 너무 친절한 사장님이다.



결제 마치고 한숨 돌리고 있는데 세 번째 임무가 주어진다.

"중기청에서 지원금 준다더라. 얼른 확인해 봐라."

곧바로 중기청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사업공고를 살펴본 뒤, 우리 회사가 지원받을 수 있는 항목이 없는지 꼼꼼히 살펴본다.

"설비 쪽은 아니고... 경영애로 쪽이 가깝겠네."

"맞아요. 재해는 아니고... 제조업이니 원자재 상승으로 인한 생산 차질?"

세부항목을 체크해야 하는 부분에서 사장님이 망설여 조심스레 제안을 해보았다.

"그래. 일단 그걸로 해보자."

그렇게 하나씩 정보를 기입하다가 제출서류 부분에서 막혔다.

"사업자등록증명원부터 재무제표까지... 거기다 재무제표는 3년 치를 제출해야 하네요."

"바로 제출 안 되겠니?"

선착순도 아닌데, 사장님은 어느새 독촉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회계사무소에 자료 요청해야 돼서 시간이 걸려요. 과장님한테 대신 제출해달라고 해볼까요?"

곧바로 담당자한테 연락해서 좌초지종을 설명한 뒤 '파인드 시스템'에 업로드를 부탁했다.


"약속 있어서 지금 나가야 하는데..."

"전에 부장님도 해봤으니까 나머지 부탁할까요?"

그렇게 남은 업무를 부장님한테 떠넘기고(?) 급하게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겠지?"

"중간에 미용실 들렀다 가면 약속 시간 못 맞출 것 같은데요?"

지인들과 저녁식사 하기로 약속했는데, 사무실에서 늦게 나오는 바람에 일정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아슬하게 미용실 근처에 사장님을 모셔다 드린 후 곧장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퇴근 시간이라 막혔고, 차선을 애매하게 물고 가는 차들이 유난히 많았다.

'제발 무사히 귀가할 수 있기를...'


집에 도착하자마자 녹초가 되었고,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왜 사장님은 멀티가 안 되는 내게 여러 가지 일들을 한꺼번에 시키면서 재촉하는 걸까. 나의 업무능력을 이런 식으로 평가하려는 걸까. 아니면 믿고 맡길 만한 비서(?)가 없어서일까. 어느 쪽이든 업무폭탄은 가급적 피해 가고 싶다. 순서를 정해 하나씩 업무를 처리하는 내게 사장님의 무작위적인 지시는 말 그대로 달갑지 않은, 폭탄이기 때문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침묵 속에서 맹렬하게: 드라마 <더 글로리>를 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