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가 대인관계에 미치는 영향

by 은수달

MZ 세대에게는 ‘삐삐(정확한 용어는 beeper)’라는 단어가 외래어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90년대 후반까지 삐삐는 현대인의 필수품이자, 소통의 중요한 매개체였다. 수신번호를 확인하면 곧바로 공중전화를 찾아 전화를 걸던 풍경은 이제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다.


휴대전화가 보편화되면서 이젠 누군가를 무작정 기다릴 필요도, 친구 집에 전화를 걸어 친구를 바꿔 달라고 부탁할 필요도 없어졌다. 대신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연락 안 되면 상대를 의심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나 역시 휴대전화 덕분에 일상이 편리해지긴 했지만, 그만큼 사적 영역은 수시로 침해받고 있다. 인스타에 올린 사진을 보고 지인한테 연락 와서 ‘나한테는 바쁘다더니, 다른 사람들이랑 잘 어울려 다니네요.’라는 불필요한 비난을 듣게 되었고, 여기저기서 울리는 카톡 알람이나 전화벨 소리 때문에 대화에 집중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꼭 필요할 때 연락하라고 알려 준 카톡 아이디로 지나치게 사적인 질문을 하거나 귀찮게 한 사람도 있었다.


얼마 전에 어느 커뮤니티에서 ‘읽씹(읽고 무시하는 것)’과 ‘안 읽씹(안 읽고 무시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게 더 기분 나쁘냐는 모 회원의 질문에 대해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결과는 똑같지만, 나로선 ‘그렇게 기분 나쁘면 직접 통화해서 물어보던지, 아니면 상대가 메시지를 무시할 정도로 바쁘거나 본인에게 관심 없다는 표시로 여기면 되지, 굳이 둘의 차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카카오톡을 막 사용하기 시작할 무렵, 누군가 내게 메시지를 보냈는데 읽고 답을 안 한 적이 있다. 그러자 상대는 전화 와서 내게 왜 답이 없느냐고 따졌다. 그때, 처음으로 ‘1’이라는 숫자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정말 바쁘거나 대답하기 귀찮을 땐 ‘1’을 기념물처럼 남겨두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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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으로 자신을 버린 상대가 다른 사람과 잘 먹고 잘 지내는 모습을 보고 분노를 느끼거나, 전 연인의 아이디로 로그인해 불편한 진실을 알고서 혼자 괴로워하는 사연도 종종 듣는다. 가끔 카카오톡의 프사(프로필 사진)나 상태 메시지를 보고 상대의 심리상태를 짐작(?)해서 진실 여부를 판가름해 달라고 묻는 이들이 있다. SNS와 별로 친하지 않은 내게 그들의 모습은 안타까우면서도 왜 스스로 고통을 자초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물론 SNS 덕분에 우린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직접 만나서 진솔한 얘기를 나누는 대신 짧고 무의미한 대화들을 습관적으로 주고받을 뿐만 아니라, 메시지 횟수나 내용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 이들에겐 ‘그럴 시간에 차라리 잠을 자거나 자기 계발에 투자해요.’라고 조언해 준다. 달콤한 사랑을 속삭이며 영원히 곁에 있어 줄 것 같은 연인은 언젠가 내 곁을 떠나지만, 남들 모르게 쌓은 경력이나 머리맡에 두고 읽은 책의 구절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미 마음 떠난 연인의 곁을 맴돌며 감정과 시간을 쏟느니 자신에게 좀 더 집중하거나 상처를 회복하는 데 쓰는 것이 훨씬 더 값지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난 연애할 때마다 상대와 굳게 약속한다. 서로의 휴대전화를 보여달라고 요구하거나 SNS 공유를 강요하지 말 것. 내 얼굴이 나오는 사진을 누군가 SNS에 허락 없이 올려서 화낸 적도 있고, 나 몰래 휴대전화의 사진을 보고서 못 본 척한 누군가에겐 크게 실망한 적도 있다. 영화 <완벽한 타인>에 나오는 것처럼, 휴대전화나 SNS는 비밀을 감춘 채 언제 그것을 드러낼지 모르는 판도라의 상자와 같다. 불편하거나 안 좋은 얘기일수록 직접 만나서 풀거나 아니면 그냥 넘어가자. 평생 입에 담아보거나 들어본 적 없는 불쾌한 얘기를 메시지로 전달받는다면, 그동안 담아둔 서운한 감정을 카톡으로 전달하거나 로맨틱한 사랑을 가장해 구구절절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늘어놓는다면 상대에게 호감을 느낄 사람이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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