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엄마를 따라 수건을 접는데 게을리하지 않았었다.
접은 수건을 다시 꼭꼭 눌러 수건장에 욱여넣고 계신 엄마를 지켜보다가 왜 힘들게 그래야 하는지 물었다.
“수건장이 그렇게 생겼으니까 그렇지!”
엄마는 뭐 그런 질문이 있느냐는 듯 받아치셨다.
긴 직사각형의 수건을 반으로 접어 정사각형으로 만들고 그 정사각형을 또 접어 작은 직사각형으로, 그 직사각형은 왼쪽 오른쪽에서 각 1/3씩 가져와 손안에 들어가는 직사각형으로 접는 방식.
내가 기억하는 수건장들은 늘 변기 위쪽에 자리했는데 그들은 변기 이용자에게 행여 누가 될까 긴장해서 최대한 납작하게 벽에 붙어있었다. 경험한 대부분의 집이 그랬다. 그 수건장의 태도가 인간의 도리라도 되는 양 나도 엄마를 따라 그렇게 접은 수건을 밀어 넣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렇게 접지 않는데 그 시작은 수건장이 따로 없는 시골집에서 내 살림을 차리고부터다.
귀촌해서 그이 혼자 집 짓는 동안 월세로 살았던 시골집. 임시로 잠깐 거쳐갈 줄 알았는데 2년을 훌쩍 넘기고야 흙집을 떠날 수 있었다.
수십 년의 세월에 바닥도 벽도 기울어져 미닫이문 여닫기가 황소고집인 시골 흙집은 모든 것이 규격과 거리가 멀었다. 다행히 푸세식 화장실은 면했지만 수건장이 따로 없었기에 큰 바구니를 선반에 두고 수건장으로 사용해야 했다.
두 번 접은 수건을 느슨한 바구니에 헐렁하게 쌓기
사용해보니 일하는 사람이 편한 이 방식이 좋았다. 수건 접기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을 줄여 낮잠을 자면 어떠한가? 그리하여 우리가 직접 지은 집의 수건장은 세면대 하부장에 큼지막하게 자리하게 되었다.
정해진 수건장이 없고서야 내 성격에 맞는 수건장이 생긴 것이다. 서울을, 한국을 벗어나고서야 시골에 살아볼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살던 집, 직업, 친구들.
그이와 나는 이민을 간답시고 우리의 몸뚱이만 빼고 다 정리했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채 한국 밖 여기저기를 굴러다니다 보니, 우리가 추구하고 원하는 대략의 목차가 드문드문 드러나더라.
저 하늘에 구름 대신 띄운 행복을 좇아, 지도 없이 하루하루 살다 보니 남쪽 마을에서 내 게으름을 받아주는 수건장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우리가 지은 집을 둘러본 가족은 한 마디씩 하신다.
“방문은 없냐?”
-방이 없으니까요~^^;
“천정이 높아서 불안하지 않아?”
-높은 천정이 저는 여유로워요~^^;
“화장실에 슬리퍼가 있어야지.”
-샤워실을 뺀 나머지는 건식이에요~^^;
“인덕션이 3구는 돼야지 손님 오면 어쩌려고?”
-손님까지 집 구성원에 넣을 수는 없는걸요~^^;
“냉장고 큰 걸로 바꿔라.”
-너무 먼 훗날의 걱정까지 저장하진 않을래요 ^^;
처음에는 누구나 하는 의구심을 일일이 채워드렸으나 이제 우리는 웃어넘기고 만다.
내 취향과 생활패턴과 분수에 맞는, 내 몸에 딱 맞는 집을 만드는 동안은 힘껏 휘두른 망치가 내 손을 내리쳐 눈물이 핑 돌아도 웃을 수 있었다.
오늘도 웃으며 혼자 집짓기 프로젝트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집짓기의 한 조각을 유튜브에 영상으로 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