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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는이가 Jun 19. 2024

여고생의 티눈

십 년 묵은 체증 쥐도 새도 모르게 단번에 뿌리 뽑는 노하우 대방출

까~악! 깍! 까아~악!

지켜야 할 새끼가 있는 직박구리가 나를 향해 경고하듯 비명을 질렀다. 유월은 번식에 분주한 달이라 그런가 새뿐 아니라 뱀, 모기, 개미, 지네, 화상벌레... 다들 예민한 듯하다. 그걸 알리 없는 백구들은 산책 나와서 그저 신났다. 길 쪽으로 리드줄을 당겨도 그들이 사는 세상이 궁금한 백구들은 기어코 풀숲으로 코를 박고 킁킁대거나 괜히 한 번 풀숲에 뛰어든다. 재작년인가 이맘때 백구 솜치가 그러다 뱀에게 물려서 병원신세를 졌었지. 백구들 따라서 나도 풀숲에 들어가곤하니 본격적으로 장화를 신어야 하는데 올해부터는 장화를 너무 사랑하지 않으련다.


작년에는 새로 장만한 장화가 발볼도 여유 있고 신고 벗기도 편해서 주야장천 신었었다. 봄부터 늦가을까지 장화를 실컷 신고는 겨울이 되어서야 뭔가 잘못된 걸 알아챘다. 양 발의 두 번째 세 번째 발가락 사이마다 딱딱하게 자리 잡은 것들이 단순히 굳은살이 아니었던 것. 발가락을 살펴볼 일이 없어서 티눈인 줄 몰았던 것. 한때 10년 넘게 티눈을 안고 살아봤기에 개미 눈곱만 한 이 작은 못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변모하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존재만으로도 지리멸렬의 예고편이자 지긋지긋의 재방송이었다.


요즘은 교복을 입어도 그 위에 패딩점퍼도 걸치고 운동화도 신는 등 복장이 자유롭지만 라떼는 엄격한 교칙이 정도를 넘어서 교복차림으로 길에서 떡볶이도 못 먹게 했다. 이유는 격 떨어진다고.... 그러니 고등학교 때부터 입기 시작한 교복에는 필히 굽 3cm의 검은 구두를 신어야만 했다. 구두 신은 여고생은 지각할까 봐 지하철부터 학교까지 내달리고 그러다 지각하면 구두 신은 발로 운동장 다섯 바퀴 더 달리고 땀범벅이 되어서 교실에 들어갔다. 하교 후 구두 신은 발은 나를 떡볶이집으로 이끌었다. 떡꼬치를 물고 지하철로 가다가 학주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구두 신은 발은 또 전력질주 해야 했다. 구두 속의 발이 어쩌고 저쩌고 간에 2학년이 되었고 그러는 사이 언젠가부터 오른쪽 새끼발가락 쪽 발바닥에 딱딱한 섬유종이 자리 잡아 버렸다. 0.01mm였을 그 작은 것이 보통 거슬리는 게 아니어서 약국에서 파는 액체약을 발라 잘라내고 티눈고를 붙여 불리는 등 갖은 애를 썼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커졌다. 고3이 된 나와 함께 그것도 무럭무럭 자라서 연필두께만큼 되었다. 확장된 넓이만큼 두꺼워진 티눈을 내 몸무게가 누르면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걷다가도 공부하다가도 불시에 신경 쓰였지만 대학을 가려면 일단 덮어두고 구두를 계속 신어야 했다.


  "나는 대학만 붙으면 제일 먼저 살 뺄 거야."

  "나는 대학 가면 제일 먼저 티눈 뺄 거야."

  "아 뭐야~ 고작 티눈이ㅋㅋㅋ"


절친은 내 다짐을 듣고 어이없다는 듯 웃었지만 책상에 오래 앉아서 차곡차곡 쌓인 내 뱃살보다도 밀도 높기가 화강암 뺨치는 티눈 무게가 더 나갈 것 같았다. 미래의 남편이 내 발바닥 티눈을 보고 얼마나 이상하게 보겠어. 거대티눈이 콤플렉스라 나는 이성친구를 만나지도 결혼도 못할 거라 생각했다.

대학을 갔고 운동화를 즐겨 신었지만 발바닥의 힘이 쏠리는 지점은 달라지지 않아서 티눈도 여전했다. 더 커지지만 않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1학년 여름방학을 맞았고 드디어 수술대에 올랐다.

  "마취 들어갑니다."

내 발 아래의 매스 부딪히는 소리, 서걱 베어내고 한 땀 한 땀 봉합하는 느낌이 고스란히 느껴지면서 눈을 감아도 장면이 보였다. 처음 오른 수술대가 두려울 법도 한데 그보다는 기대로 가득했다.

  '드디어 자유다. 해방이다!'

쩔뚝거리며 집에 도착하니 거즈 밖으로 흥건히 배어 나오는 피와 함께 통증도 번져왔다. 피가 완전히 멈추는데 사나흘 걸렸고 살이 아물었는데도 한동안 걷지 못했다. 방학 내내 누워있었지만 벼르고 벼르던 숙제 덩어리 하나를 해결한 것만으로도 보람 있었다. 개학하고 학교에 가니 이목구비가 뚜렷해져서 나타난 동기 몇몇이 있었다. 나도 그들 못지않게 당당하게 살아갈 거라 생각했는데 곧 실망했다. 티눈이 새살과 함께 원래 그 자리에 그대로 똑같이 돋아난 것. 그 고생을 했는데 너무하네. 의사와 하늘을 원망하면 어쩌겠어. 안 되는 건 안 되나 보다 하고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대학도 졸업하고 직장도 다니고 때려치우고 다시 다니고 이별하고 만나고 울고 불고 이래저래 서른이 되었을 무렵 1년 정도 재택근무 하던 시기가 있었다. 때는 내 방 책상에서 근무한지 반년 정도 지나서였을 것이다.

  '어어? 티눈 어디로 갔어?'

매끄러운 내 발을 발견하고 당혹했던 기억이 강렬하다. 발바닥 한켠의 변형된 지문만이 거대티눈 실화를 증명하고 있었다. 지옥까지 쫓아올 것 같은 티눈이 소리소문 없이 떠나갔다. 기별도 없이 무슨 일일까? 의아하기도 얼떨떨하기도 했다.

그때 나의 일과를 복기해 보면 아침 7시에 요가원 다녀오고 일 마치면 6시에 요가원 갔다가 클라이밍장에 가서 10시에 집에 들어왔다. 요가원은 2분 거리, 클라이밍장은 5분 거리. 의도치 않게 거의 걷지 않고 지낸 셈인데 반년 만에 티눈이 사라진 건 압력, 원인제공을 하지 않아서라고 확신할 수밖에. 걷지만 않았지 운동량이 많아 그 어느때보다 혈액순환이 원활했다.


지난겨울에 발견한 티눈들은 넓은 볼의 장화 속에서 중심을 잡으려 발가락 힘을 꽈악 쥐고 걸은 탓이라 확신하고 당장 장화를 벗어던졌다. 이따금 확인해 보면서 ‘아직 티눈 있네 이대로 커지면 어쩌나’하다가 다른 걱정으로 이어가곤 했다.

봄이 지났고 여름이 코 앞으로 다가온 오늘.

  '아! 그거 어떻게 됐지?'

최근 두어 달은 다른 일로 정신이 쏠려서 티눈은 아예 잊고 지냈다. 문득 떠오른 티눈 생각에 발가락을 살펴보니 내 발가락은 어떤 굳은 살도 없이 반들반들하다. 거대 티눈이 순삭했을 때처럼 기가 막히게 딱 반년이 지나서 였다.


별일 없이 산다는 게 이런 걸까?

티눈 얘기가 너무 거창해졌네~ 하면서도 티눈 하나의 파장을 생각하면 거창하게 다룰만한 것 같다.

티눈이 있다면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증거니까.

마음의 티눈. 미움, 복수, 분노 따위의 부정적인 감정에 최대 복수는 별일 없이 오늘을 잘 사는 거라 들었다.

그나저나 시골에서는 장화가 필수인데 어쩌나?


안 신을 수는 없으니 발볼 잘 맞는 다른 장화를 찾아봐야지.

그리고 운동화 장화 등산화 슬리퍼 고루고루 신어야지.

코끼리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기린을 생각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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