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ay. 대망의 국기원 승단심사

그간의 노력을 순간으로 평가받으며 이렇게 마음 편했던 적은 없었다.

by 은하나

수능 당일 아침 같았다. 난 두 번의 수능을 치렀는데 때마다 잘 자고 개운하게 일어나 꽤 덤덤한 마음으로 시험장을 향했다. 그땐 덤덤하긴 했지만 단 하루로 노력을 평가받는 기분만큼은 영 찝찝했었다. 그런데 승단심사 날 아침은 너무 떨렸지만 기분만큼은 훨씬 상쾌했다. 우선 1년 넘는 시간 동안 포기하지 않고 아이들 틈에서 운동하다 결국 국기원까지 가게 된 내가 썩 귀엽고 자랑스러웠다. 몸으로 배운 건 절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걸 실감했던 기간이었기 때문에 심사에서 혹시 실수하거나 그로 인해 심사에 떨어진대도 겸허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도복과 안에 입을 흰 반팔티, 그리고 빨간 띠를 챙겨 국기원으로 출발했다.


나보다 사범님이 긴장했던 이유

심사 두 시간 전. 사범님을 만났다. 도복이 아닌 사복으로 만나서 그런지 왠지 낯설었는데, 그 보다 더 낯설었던 건 긴장한 사범님의 모습이었다. 승단심사는 당사자뿐 아니라 지도자도 함께 평가받는 자리라고 했다. 올바르게 교육해 좋은 자세와 실력을 갖춘 이들을 배출할수록 좋은 건가 싶었지만 깊게 묻진 않았다. 회사에서 선배가 비슷한 상황에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괜히 내가 누를 끼칠까 싶어 마음 졸여했겠지만, 그냥 심플하게 나만 생각하기로 했다. '사범님도 긴장하셨군요. 저도 긴장되지만 잘해볼게요.' 정도. 딱 거기까지. 사범님은 약간 상기된 채로 품새 추첨 현장으로 갔다. 룰렛 같은 걸로 당일에 심사 볼 품새 2개를 추첨한다고 했다. 추첨이 끝났다. 내가 보게 될 품새는 3장과 8장.


맨발의 빨간 띠로 가득했던 국기원 심사장 복도

품새가 결정되자 복도에는 여러 태권도장에서 모인 사람들과 그들의 사범님들로 가득 찼다. 심사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2개의 품새를 반복 연습해 몸에 익히려는 거였다. 복도 바닥이 정말 더러웠는데도 모두가 신발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품새를 하고 발차기를 하며 겨루기를 연습했다. 그 공간에 모인 사람들의 긴장감과 집중, 그 공기와 분위기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3장과 8장 둘 다 조금씩 헷갈리는 동작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범님의 구령 없이 반복해서 연습했고 끝까지 디테일한 자세를 바로 잡으려 집중했다. 겨루기는 구령이 떨어지자마자 발차기 공격에 들어가는 스타트 포인트만 집중 연습했다. 몇 번 해보지도 못한 것 같은데 번호가 불렸다. 이제 사범님 없이 혼자 심사 과정을 해내야 하는 순간이었다.


매 달 있다는 심사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줄 몰랐다. (사진 밖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실전은 혼자, 믿을 건 나 자신뿐

이제 사범님의 역할은 다한 듯했다. 지하에서 수험표를 받아 도복에 걸고 올라오니 사범님은 관중석 난간에 물가에 내놓은 아이 바라보는 나를 보고 계셨고, 계속 파이팅을 외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보였다. 와 진짜 실전이구나 싶었다. '집중하자. 실수해도 그냥 가자. 괜히 멈추거나 실수했다고 다시 시작하지 마. 그냥 고!' 이 말만 계속 되새김질했다. 기본 동작으로 심사는 시작됐다. 눈 감고도 했던 동작이었는데, 도장에선 나뿐이었지만 비슷한 실력에 훨씬 절도 있어 보이는 사람들 틈에 기합소리까지 쩌렁쩌렁 울려대는 공간에서 하려니 촉각이 곤두섰다. 두 가지 품새 중 8장에서는 약간 실수가 있었다. 순간 다음에 이어갈 동작 하나가 생각이 안 나는 거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일단 절도 있게 즉석에서 동작을 만들어 냈다. (나중에 들어보니 크게 티나진 않았는데 너무 당당하게 새로운 동작을 선보여서 피식하셨다고...) 잠깐 실수가 생기니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 비교가 정말 습이 됐구나 됐어. 나보다 정확하고 당당하게 동작을 이어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보니 조급해지려 했지만 그럴수록 최대한 나만 보려고 노력했다. 내 속도, 내 동작, 내 심사에만 집중하자. 그 생각뿐이었다.


겨루기는 기세야 기세

품새를 마치자마자 바로 옆 겨루기장으로 이동한다. 비슷한 체급끼리 붙여준다고 해서 내심 안심했는데 체급'만' 같을 거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내 상대는 정말 단단해 보였다. 눈빛이 무서워 기세에 눌리는 것 같았다. 호루라기가 불리면 사범님께 배운 대로 우렁찬 기합과 함께 발차기를 날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도장의 사범님들도 같은 조언을 했을 거란 사실도 간과하고 말았다. 시작과 동시에 발차기를 얻어맞고 정신이 번뜩 들었다. 다시 달려들어 배웠던 발차기를 연속으로 했다. 심사 전 스트레칭도 충분히 했고 품새로 몸도 풀려 가벼울 줄 알았는데 긴장감 때문이었는지 상대방 기세에 눌린 건지 몸이 내 맘대로 움직이질 않는 것 같았다. 그 이상의 생각은 떠올릴 겨를도 없이 겨루기는 순식간에 끝났고, 이로서 승단심사의 모든 과정도 종료됐다.


심사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태권도 1단은 그리 어렵지 않게 딸 수 있다고들 하지만 이제 그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모든 심사를 끝내고 나니 더욱 그랬다. 너무 개운했다. 사범님은 합격할 것 같으니 걱정 말고 집에 가서 푹 쉬라고 했지만 그동안 지도해주셔서 감사했고 오늘 고생 많으셨다고, 일주일만 쉬고 도장에서 다시 뵙자는 말씀만 드렸다. 난 무엇보다 결과가 중요한 사람이고, 태권도의 시작도 1단이라는 결과를 목표로 했었는데. 글쎄. 그땐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마음으로 시작했던 태권도였는데. 어찌어찌 모든 과정을 건너 결국 했구나. 해냈구나 내가. 1단을 따든 못 따든 난 이미 해낸 거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그 날만큼은 그 정도의 뿌듯함으로 스스로에게 아낌없는 칭찬을 쏟으며 안아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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