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단도 단 김에 빼자! 승단심사 벼락치기

시간의 세례보다 짧고 굵게 집중력 있는 펀치가 강력할 때도 있다.

by 은하나

1년이 넘었다. 띠 색은 빨간색. 맨 처음 등록 상담을 받을 때 1단을 목표로 1년 잡고 가자는 계획이었는데 중간에 사정상 쉬다 하다 했던 텀이 있어서 예상보단 늦어졌다. 그래도 흰색이 빨갛게 색칠해질 때까지 1단을 꼭 따겠다는 목표로 나름 재밌게 해왔던 것 같다. 스스로에 대한 기특함은 잠시 뒤로하고 이제 승단 심사 준비를 해야 한다. 태극 8장까지 끝내면 본격적으로 국기원에 갈 준비를 할 수 있다. 드디어 모든 과정을 배웠다. 하지만 사범님은 아직 이르다고 했다. 1장부터 8장 중에 랜덤으로 주어지더라도 톡! 치면 탁! 하고 품새가 나와야 하는데 나는 눈알부터 위로 돌아갔다. 아직은 로딩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던 것이다. 1장의 기억을 되살리고 나면 2장이 흐릿하고, 2장은 됐다 싶으면 3장의 마지막 동작과 헷갈리고. 이 무슨 뫼비우스의 띠란 말인가. 사범님은 반복해서 몸에 익히고, 정말 자신 있다 싶을 때 도전하셔도 된다며 만류했지만 여기에서 더 늘어지면 만년 빨간 띠로 남을 것 같았다.


닥치면 다 하게 되겠지. 에라 모르겠다! 국기원 승단심사 벼락치기 돌입!

쇠뿔도 단 김에 뺀다고. 1단도 단 김에 빼야겠다고 생각했다. 완전해질 때까지 기다리다간 몸도 마음도 늘어지게 생겼다. 언젠간 몸에 익겠지 생각하니 자꾸만 게을러졌기 때문이다. 불확실함에 대한 두려움이 큰 인간이라 100이 아니어도 최소 90은 되어야 움직이는 편인데, 태권도는 왠지 마음이 편했다. 어떻게든 할 테니 일단 신청만 해달라고 했다. 사범님은 아직 걱정스러운 눈치였지만 더 이상 말리기엔 내가 너무 단호했다. 인생에 내질러본 적이 몇이나 된다고 승단심사 정도는 질러보고 싶기도 했다. 불합격하면 뭐, 다시 보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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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치기 1. 기본 동작 복기

다시 처음부터 리셋. 배웠던 모든 동작을 반복해서 복기했다. 심사 때는 '기본 동작 시작!'이라는 구령만 주어진다고 했다. 그럼 같은 조에 배정된 모두가 사회자의 구령에 맞춰 해당 동작을 하고 자세를 바로 잡아야 한다. 각자의 속도대로 거울 없이 심사위원들을 마주 보고 동작을 해야 하기 때문에 최대한 그 상황과 비슷하게 반복 연습했다. 틀려도 틀리는 대로 사범님은 중간에 잡아주지 않았다. 모든 복기가 끝나고 나서야 어느 부분에서 어떤 실수가 있었는지 짚어주는 식이었다. 1년을 넘게 매일 반복했던 기본 동작인데도 긴장되니 조금씩 삐끗했다. 국기원에 가면 훨씬 긴장될 테니 지금 최대한 반복해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본 동작은 말 그대로 '기본'인데 이걸 못해버리면 검은 띠를 거저 준대도 개운치 않을 것 같았기 때문에.


벼락치기 2. 품새 랜덤 플레이

품새 8개 중 승단심사 당일에는 2개가 랜덤으로 정해진다. 어떤 품새가 어떤 순서로 주어질지 모른다. 그동안 1장부터 8장까지 단계별로 배워왔기 때문에 1장을 해야 자연스럽게 2장 동작을 할 수 있고, 3장을 해야 4장이 생각나는 식으로 몸에 익어버렸다. 이걸 깨야했다. 남은 시간에 비해 내 기억력은 형편없었기 때문에 시험공부하듯 훈련하는 수밖에 없었다. 1장부터 8장까지 순서대로 외워 해보고, 그다음은 순서를 거꾸로 해보기도 했다. 1장부터 4장까지 했다가 8장부터 5장으로 거슬러 내려오기도 하고, 사범님이 랜덤으로 불러주는 품새를 해보는 식으로 연습했다. 순서를 섞어 연습하다 보니 품새마다 미묘하게 다른 동작들이 뒤섞여 조급해졌다. 침착하게. 품새마다 헷갈리는 동작은 포인트 삼아 내 마음대로 품새에 이름을 붙여 외웠다. 1장은 임금 왕(王), 4장은 바깥막기 등등. 시험 족보 만들던 실력을 여기서 발휘하나?


벼락치기 3. 겨루기 포인트 레슨

기본 동작과 품새는 혼자 해내면 된다지만 상대가 있는 겨루기는 나도 사범님도 가장 걱정되는 파트였다. 그간 배운 스텝과 발차기를 자유롭게 활용해서 상대방과 겨루는 그 찰나는 심사하는 방식이었고, 어떤 상대와 하게 될 지도 당일에 결정되는 것이어서 미리 합을 맞춰 가기도 어려웠다. 겨루기 벼락치기는 포인트 레슨으로 전략을 짰다. 사범님은 무조건 기합을 크게 넣으라고 했다. 처음에는 이 말이 너무 웃겼는데 연습하다 보니 기합을 크게 넣을수록 자신감도 생기고 동작도 힘이 붙었다. 괜히 상대방을 기선 제압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스텝을 오래 밟으며 타이밍을 보지 말고 시작하자마자 발차기부터 하라고 했다. 한번 찼으면 백스텝으로 물러나지 말고 상대방이 발차기를 하더라도 물러나지 말고 배운 발차기를 한 번에 때려 넣는다는 생각으로 몰아치라는 미션이었다.


국기원에 갈 날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최근 3~4년 동안 그 어떤 경쟁 PT 준비 기간 보다도 긴장되고 설렜다.

이렇게 하나에 몰입하고 간절히 바라는 경험도 회사 밖에선 거의 처음이 아닐까 싶었다.

세상에! 이럴 수도 있는 거였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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