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은 정말 내가 알았던 것일까?
태권도 1단을 향한 여정은 어느덧 후반부. 퇴근 후 도장에 오면 익숙하게 몸을 풀고 품새를 연습한다. 선배님들 앞에서 처음 자기소개를 하던 날 빳빳했던 도복도 많이 빨아 흐물 해지고 새하얗던 색도 조금은 색이 바래었다. 국기원에 가기 전까지 배운 품새가 배워야 할 품새보다 많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기본 동작 이름도 헷갈려서 아래를 막으라는데 얼굴을 막지를 않나, 앞서기를 하라는데 다리를 쭉 뻗어 앞굽이를 하던 쪼렙 시절은 지났다. 여전히 도장에는 유품자들이 가득해 모두가 검은띠를 매고 있지만 그래도 이제는 나도 아주 모르진 않는다는 자신감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도 후배가 생겼다. 흰 띠와 빳빳한 도복에 머쓱한 공기가 온몸을 감싼 성인 한 명이 새로 등록을 한 것이다. 남자분이었고 자기소개할 때 들어보니 나이는 나보다 한 두 살 많은 것 같았다. 세상에! 이건 마치 회사에서 만년 막내 탈출한 기분이었다. 물론 도장에선 누가 선배고 후배고 그런 건 없지만 나 혼자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곤 했다. 회사에서 막내 후배가 생기면 본인의 어리숙했던 그때를 생각하며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고, 나도 저랬던가 회상에 잠기듯이 태권도장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내게 몇 단계 앞서고 있는 친구를 붙여 동작을 알려주거라 했던 것처럼, 이제 내게도 그분이 동작을 어려워할 때마다 자세를 잡아주고 알려주라는 미션이 떨어졌다.
이상했다. 난 무려 태극 6장을 배우고 있었고, 이 말은 태극 1~5장은 마스터했다는 의미가 된다. 최소 그 두배수의 승급심사를 거쳐 다섯 개의 품새를 무리 없이 할 수 있다는 사범님의 판단하게 지금의 단계에 온 거란 말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무엇이 이상했느냐. 난 분명 아는데 몰랐다. 태극 1장부터 시작하는 흰 띠 후배님이 '이다음 동작이 혹시 뭔가요?' 물어보면 그 동작을 알기 위해 나는 처음부터 그 지점까지 모든 동작을 거치고 나서야 알려줄 수 있었다. 마치 알파벳 L 다음 순서를 알기 위해 ABC송을 불러야만 하는 것과 같았다. 혼자 할 때는 막힘없이 동작이 이어지는데 막상 알려주려니 머릿속이 흰 띠보다 새하얘졌다.
어째 배우는 것보다 알려주는 것이 훨씬 어려웠다. 그 말은 곧 안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아는 게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지금 배우고 있는 6장은 술술이다. 그런데 그 이전 것은 분명 배웠어도 헷갈렸다. 완전히 내 것이 된 건 아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다. 하나하나 끊어서 배웠던 품새 동작들을 부드럽게 잇고, 절도 있게 힘주어 동작하는 방법을 배우다 보면 이전에 배운 품새는 품새가 아니었던가 하는 혼란에 빠졌다. 돌려차기 같은 발차기 동작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몸을 틀어 발 차는 게 돌려차기라고 배웠고 그렇게 했을 때 별말씀 없으셨는데. 쪼렙의 돌려차기와 태극 6장에 후반부로 달려가는 지금의 돌려차기가 다르기라도 하단 말인가. 몸을 더 확 튼 상태에서 찬 발이 무릎선을 나가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올바른 자세로 고쳐서 발차기를 하니 축이 되는 쪽 다리에 생각보다 더 많은 힘이 들어간다는 걸 알게 됐다. 그간 큰 그림을 전반적으로 그려오며 감을 익혔다면 이제 방향에 맞게 가지를 뻗고 예쁜 모양새로 잎을 내야 하는 단계였던 것이다.
직장인 3년 차에 태권도를 시작해 중간에 일이 바빠서 한 두 달씩 빠지는 달을 건너뛰다 보니 어느덧 4년 차. 그동안 바뀌어 온 태권도 띠 색깔만큼이나 회사에서도 많은 프로젝트, 사람들, 성취와 실패를 겪었다. 예전에는 도가 텄다고 생각했던 영역에서 넘어지기도 하고, 이 것만은 자신 있다 생각던 일도 알수록 어렵다는 생각을 꽤 하게 됐다. 진짜 안다는 건 뭘까. 어쩌면 회사생활하는 동안 내가 정말 '안다'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손꼽을 수 있을까. 할수록 어렵고 갈수록 모르겠다. 아는 것도 모르겠고 쉬웠던 건 어려워진다. 그러니 더욱 잘 알고 싶어 바둥대며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지 않겠나 싶다. 내가 태극 6장을 할 땐 6장의 마스터다. 1~5장을 배웠지만 헷갈린다 해도 다시 그 품새를 가장 잘 아는 친구에게 물어보고 익히면 그만이다. 그리고 또 나중에 태극 6장이 희미해져 간대도 나는 그 단계에서 가장 잘 아는 무언가가 있겠지.
회사가 아니어도 괜찮은 하루를 만들고 싶어 시작한 태권도에서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참 많이 얻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