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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연 Dec 18. 2020

모드 쥘리앵의 「완벽한 아이」를 읽고 나서

내가 보고 겪은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나아가는 삶에 대하여.

#모드쥘리앵 #완벽한아이

#복복서가 #김영하추천 #독서


김영하 작가 추천 복복서가의 완벽한 아이, 모드 쥘리앵


모드는 루이 디디에(아버지)와 자닌(어머니)에 의해 태어난 아이다. 루이 디디에는 세상과 인간의 본질을 회의적인 시각에서 바라본다. 이로 인해 ‘모드’가 세상의 어려움이나 고통에도 굴하지 않고 강한 인간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즉 강한 의지를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니체의 ‘초인’을 의미하는데, 사실 니체의 초인은 주체적인 의지를 가진다는 점에서 모순적인 교육관이라고 볼 수 있다. 


루이 디디에는 모드를 철저히 객체로 고정 시킨 후 , 자신이 보고 겪었던 경험을 일방적으로 주입시킨다. 모드를 인격이 아니라,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헌신해야 하는 존재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 과정 속에서 어머니 자닌의 희생은 불가피한 귀결이었다. 루이 디디에는 모드의 교육을 위해 자닌을 기르고, 자닌에게 고정된 역할을 강요한다. 


p.73 “나를 실망시켜선 안돼. 네 어머니처럼 약한 사람이 되어선 안돼” 를 고려할 때,

루이 디디에는 자닌에게 희생을 강요하면서도, 그 희생을 하는 자닌을 나약한 인간으로 보고 있다.  



일방적인 헌신을 요구하는 루이 디디에는 자기 삶이 평생토록 불행했음을 방증하고 있다. 자기가 보고 겪은 것만을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 제한된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이 겪은 상처와 불행이 너무 큰 나머지, 그 외 다른 것들은 한낱 가벼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아버지로 인해, 모드는 ‘낙타’처럼 순종하고 복종하는 태도로 아버지 곁에 있었다. 하지만 문학을 알게 되고,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주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삶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던지게 된다. ‘사자’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은 모드는 “뭐든 겪어볼 만한 가치가 있어. 더 이상 두려워 하지마.”라고 말한다. 즉 문학의 세계에서 처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그럼에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겪은 세상이 꼭 세상의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


결국 모드는 벗어난다. 자신을 속박하는 아버지의 굴레로부터. 그러나 아버지의 존재가 물리적으로 사라졌다고 해서 아버지에 대한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모드는 일상생활 중에, 과거의 경험으로 인해 불안했기 때문이다. 모드는 타인과 어울리는 법에 대해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그때마다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과 불행은 모드를 끊임없이 좌절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인식한 모드는 진짜 자신을 찾게 된다. 어쩌면 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했던 니체의 3단계, 인생을 즐기고 새로운 활력을 얻은 ‘어린 아이’의 단계로 돌입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진짜 자신의 삶을 마주하기 위해 기존의 삶을 버리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물론 규모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이라면 상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계속 되살아나는 좀비처럼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나’의 정체성에 위협을 주기도 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어떤 경험을 하게 될 때, 그 ‘상처’로 인해 왜곡된 시선으로 세상을 마주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불행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 인간의 선택이다. 

‘모드’처럼 자신의 상처를 인정하고, 도움을 받으려는 용기를 가질 수도 있지만, 루이 디디에처럼 오직 자신이 정한 세상에 갇혀 있을 수도 있다.


 대개의 경우 사람은 자신이 정한 세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모순적이게도) 그게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드의 자서전인 ‘완벽한 아이’가 쉬우면서도 어려웠던 게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이기호 「누가 봐도 연애소설」을 읽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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