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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연 Dec 13. 2020

김성중 「에디 혹은 애슐리」를 읽고 나서(고통)

고통이 결여된 사람과의 대화는 자주 공허해진다. 

#김성중 #에디혹은애슐리 #창비

김성중, 에디 혹은 애슐리, 고통이 결여된 사람은 공허하다.


2년 전으로 기억한다. 김성중 작가님의 「국경시장」을 읽고 매료되어, 단숨에 「개그맨」 까지 읽게 되었다.「국경시장」이 어쩌면 평범했을 이야기를 산뜻하게 풀어낸 것처럼 「개그맨」 역시 창의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그 경험으로 인해 나는 김성중 작가를 ‘믿고 읽을 수 있는 작가’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녀의 단편소설집이 출간되었음을 알고 읽게 되었다. 김성중 작가라면 분명히 평범한 이야기도 평범하지 않게 풀어낼 재주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완독을 한 지금, 「에디 혹은 애슐리」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버림 받을 준비가 된 사람은 행복을 누릴 수 없다.


전체적으로 쓸쓸하고 음울한 분위기가 관통한다. 외로운 이민자의 이야기, 자아정체성을 찾는 이야기, 관계에서 상실의 경험, 자신의 이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경험 등 전체적으로 고통을 마주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어떤 종류이든 고통은 사실 필연적이고, 고통이 결여된 삶은 공허하다는 점에서 의미를 종종 잃기 마련이다.  


   

내가 사는 사회에서 철저히 이방인으로 존재하고, 고단하게 버티며 사는 것, 자신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조차도 이해하지 못한 채 방황하는 것, 관계로 인해 확장된 세계만큼 또 다른 상실의 위험성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 철저히 혼자로 버림받는 것 모두 다 극악의 고통이 아닌가. 어쩌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나아가는 것 외 다른 선택지를 찾기 힘들어 더 괴롭다. 어떤 것도 쉽지 않다. 


모든 관계는 리스크를 가지기 마련이다.


책을 읽으면서 처절한 고통과 외로움이 느껴져서 읽기 힘들었다. 단지 책의 내용 때문에 그런 건 아니다. 나는 현실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어쩌면 변태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고통을 책을 통해 뚜렷하게 마주하는 경험은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인물의 고통이 나에게도 전달되는 순간, 내가 살아가면서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범위가 확장되고 보다 포용력 있는 존재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야기에 몰입하기 힘들 정도로 지루하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야기보다 작가의 에고가 먼저 보인 작품이었다.      



힘든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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