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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연 Dec 26. 2020

거절, 그 일상적인 신호에 관하여.

거절의 신호가 특별한 것이라 생각할 때, 자신을 제대로 보기 힘들어져.


"너는  살면서 거절 몇 번이나 겪어 봤어?"

"너는 살면서 밥을 몇 번이나 먹어 봤어?"

"무슨 소리야?"

"셀 수도 없고, 셀 필요 없다는 거야."



거절은 특별한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돼.

“거절당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해. 그럴 일이 많을 거니까.”


누가 어떤 상황에서 했던 말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들은 기억이 있을 뿐이다. 새로운 것에 도전할 때, 일을 구할 때 즉, 확실히 내가 ‘을’ 일 때의 거절을 말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단순히 아르바이트나 취업의 어려움을 떠올렸다. 제한된 조건과 역량에 따라 그 사람의 필요성을 결정하는 거절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회사(사장)가 요구하는 바와 내가 가진 게 맞지 않을 때 거절당하는 것은 물론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지만, 설득력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터무니없는 것이라 생각하며 나 자신을 몰아내지는 않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떠오르는 마니또 일화

착각이었다. 거절당하는 것은 일상에서 하루에도 수 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크고 작은 모든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일어나는 의식적인 행동이다. 시간을 거슬러 보면, 학창 시절 나는 누군가의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 그게 되지 않았던 일이 꽤, 아주 많았다. 우리는 반 친구들 중 누군가와 친해지는 것을 서로 잘 맞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물론 그 가능성(진실)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죽어버린 기억 세포를 되살려 볼 때, (절친이 아닌) 다른 친구의 친구가 되고 싶었지만 거절당해 plan B를 선택하듯 또다른 친구를 찾았던 경험이 있다. 고백하건대, 학창 시절에 나는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다 그런 경우였다. 맞다, 나는 학창 시절 내내 거절을 겪었다. 다만 그게 거절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격이 밝고 모두가 좋은 아이라고 생각하는 친구가 있었다.  2011년이던 그때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2011년에 마니토를 하자고 담임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그 밝은 아이는 마니토를 뽑더니 좌절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친하지 않아서 잘해주기 싫어”라며 툴툴거렸다. 밝은 그 아이에게서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고, 그냥 그런가 보네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 친구의 바로 뒷자리라서 그 친구의 말이 잘 들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자신의 목소리가 뒷자리에 얼마나 잘 들리는지 잘 몰랐다.) 2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마니토에게 선물을 주면서 “내가 너의 마니토야”라고 발표하는 깜찍한 시간이 찾아왔다. 잠을 자고 있던 내 앞에 오레오 과자 하나가 보였다.


“A야, 내가 너의 마니토야. 이거 맛있게 먹어.”


자신의 마니토가 그렇게 싫다던 그 친구는 예쁘게 미소 지어주며, 상냥하게 말했다.


거절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일상적인 신호'이다.


  그 친구를 비난하거나 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사실 그럴 자격조차 내게는 없다. 나는 누군가의 마음을 재단하여 옳고 그름에 대해 판단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범위에서,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의사를 결정하고, 표현할 수 있다. 타인의 마음을, 감히 어찌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마니토 사건이 또렷하게 기억나는 거절의 기억이라는 것이다.


‘허락’이나 ‘거절’은 특정한 경우에 한하여 일어나는 비일상적인 경험이 아니라, 아주 일상적인 행동이다. 다만 그걸 의식하거나 의식하지 못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거절당하는 객체뿐만 아니라, 거절하는 주체 역시 거절이라는 행위에 대해 의식하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거절은 사실 그 어떤 것보다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행위이다. ‘나는 네가 싫다’, ‘나는 네가 불편해’, ‘나는 네가 맞지 않아’ 거절을 표현하는 행동에서 드러나는 예의 혹은 방법의 다양성이 있어 모를 뿐이다.     


거절당하는 것보다, 그걸 모르는 내가 더 싫었어 사실은.


하지만 나는 너무 바보 같아서, (좀 더 거칠고 솔직하게 표현하고 싶지만 절제를 해본다.) 아니 나와 나에 대한 타인의 생각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거절당하는 줄도 몰랐다. 그래서 마니토 사건 외에도, 20대에도 거절이 거절인 줄 몰랐다. 동기한테, 동료한테, 친구한테, 애인한테 모든 개인적인 관계에서 거절의 신호를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나는 그런 내가 너무 미운 한편, (‘나’를 주관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기에) 너무 짠하다. 실질적으로 가능하지 않겠지만, 가능하더라도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때로 그래도 돌아가게 된다면 말해주고 싶다.


 바보야. 저거 너 싫다는 거야. 사람들은 싫다고 네 앞에서 대놓고 말하지 못해. 하지만 넌 저 사람들의 반경에 들어가지 못하잖아. ? 넌 저 사람들에게 싫어하는아니 적어도 좋아하기 어려운사람에 들어가니까.” 


 그러니까 괜한 기대심은 버리고, 의연하게 행동하라고. 네가 어쩔 수 없는 것들로 인해 오랫동안 고생하지 말고.     



거절의 역사 너무 많은데, 동시에 너무 흑역사라 쪽팔려서 자제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너 화장 이상해" 아직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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