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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연 Aug 13. 2020

유민애「신경써달라고 한 적 없는데요?」를 읽고 나서

나를 드러내고 제대로 마주하는 것


책을 구입해서 읽은 이유

사진을 찾지 못했지만, 내가 직접 구입해서 읽었다.


날카로운 표제는 내 마음을 동요시키지는 못했다. 유튜버 크레이터인 작가의 책 출간 소식은 이미 알고 있었고, 나는 그녀를 좋아하는 구독자였지만 흔한 고민상담으로 이루어진 에세이라는 선입견을 버리지 못한 채 읽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문학이 아닌 책을 고르는 내 기준은 까다롭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시 그녀의 영상에 한참 빠졌을 때(보다 몰입하게 되었을 때) 이끌리지 않는 표제지만 그녀에 이끌렸으니까 책을 읽기로 결심했다. 에세이, 수필이라는 장르적 특성상 작가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과 관심이 없다면 읽기 쉽지 않다는 걸 난 이미 알고 있다. 그녀에 대한 애정어린 궁금증을 바탕으로 그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다.

실패와 실수가 전부 같아.


독후감


그녀는 실패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가난한 배경, 불우한 학창시절, 단절된 커리어 경력 등 사회적으로 불리한 조건과 상황을 가졌던 사람이 어느새 무기력증을 극복하여 저명한 크레이터가 되다’ 고 요약하고 싶지는 않다. 이런 식의 요약은 그녀가 말하는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완전히 틀린 요약이라고는 볼 수는 없지만, 섬세하지 못하고 조약하다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떨 때 기쁘고, 어떨 때 슬프고, 어떤 점을 참을 수 없는지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바라보는 시선은 어디에 머물러 있으며, 그 시선 끝에 닿아있는 내 삶의 욕망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는 타인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나라는 사람에 대해 한정되어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래, 적어도 나라는 사람은 나에 대해 정확히 모르고 있다. 이로 인해 나를 드러내는 것에 너무 서툴렀다.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건 나 자신에 대한 기만이기도 하다. 내 스스로 무지한 나에 대해 어떻게 드러낸다는 말인가. 타인에 대한 기만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은가.

내가 나를 모르겠어.


이로 인해 나를 드러내지 못하고 언제나 숨기는 것에 급급했다. 나를 숨기지 않는다는 건 상처를 각오해야 하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관계에 있어 맹신/불신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벗어나지 못했다. 문학 평론가 신형철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나는 복잡하게 착한 사람,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자기중심적 사고 회로를 멈추지 못했고 언제나 타인으로부터 버림받을 준비 혹은 타인을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으로 머물러 있었다. 즉 역설적으로 나르시시즘이 너무 강해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못했고, 타인을 비틀리게 바라봤으며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정체된 시기를 너무 오랫동안 보냈던 것이다.



"자신의 장점이든 단점이든 '이게 나'라고 단 하나만 제대로 인정해도 주변 사람들이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당신의 존재를 느끼고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꼭 무두에게 매력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도 세상 사람들 모두가 매력적이라 생각하지 않듯이 말이다. " p.119


겉으로 볼 때  평범한 사람이야.



표면적으로 아주 보통의 사람이다.< ㅡ사실 난 보통처럼 보이는 누군가도 나와 같은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적이 있을 거라 생각은 한다.ㅡ> 하지만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는 자주 발생한다. 부모, 친구, 그리고 연애 등. 그래, 부모님은 어쩌면 평생 봐야 하는 숙명이기 때문에 결점이 많은 서로를 이해하고 끌어안아주기도 한다. 친구 또한 잠깐 안보거나 다양한 방법으로 관계를 유보하여 오히려 더 돈독해질 수도 있다.



문제는 연애다. 연애를 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 많은 실망을 한다. 관계가 잘 되지 않을 때마다, 실패할 때마다 상대방의 탓을 하며 나는 문제 없어와 같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싶겠지만 마음속에서는 끊임없이 외치는 게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연애를 하면서 나에 대해 실망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예기치 못하게 알고 싶지 않은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되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에게 투사시켜 그 사람을 참 곤란하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한 사람과의 깊은 관계를 가지는데 있어 아닌 척, 그런 척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이 따른 자책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다들 멀쩡한데 내 인생은 왜 이래?


내 삶은 왜 이럴까? 남들은 멀쩡하게 살아가는데 나는 언제까지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나와의 관계에 있어 서툴러서 상처를 주고받을까. 나조차도 이해하기 힘들어 때로 버겁고, 지겨움을 느낀다. 그런데 더 답답한 건 명확하게 무엇이 문제라고 단정지어 말 할 수 없는 게 늘 나를 더 아프게 했다. 문제는 늘 복잡했고, 그 복잡함 속에 있는 게 오히려 나를 더 안전하게 만들어 주는 아이러니에서 나는 벗어나지 못했다.

Nobody is in charge of yourself. Except you.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나를 감당해야 하는 건 나뿐이다. 그리고 이런 나를 평생 보아야 하는 것도 나뿐이다. 아직도 난해하고 어려운 것들이 많아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살기로 했다면 스스로를 감당해보자.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니까.


20대 후반 여성인 나는 시행착오로 채워진 시기를 보냈었다. 그리고 지금도 어쩌면 그 시기일지 모른다.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했었고, 여전히 가끔 자기혐오를 한다. 하지만 그것 또한 나이고 내 삶인데 어떻게 하겠는가, 타인의 시선에서 비효율적이고, 무의미해 보이는 내 삶일지라도 내 삶이니까 기꺼이는 아니더라도, 그럼에도불구하고 안아주자.


수고하고 있어 내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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