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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연 Aug 29. 2020

허지웅「살고 싶다는 농담 」를 일고 나서  (불행)

불행이 첫번째 정체성이 되어 버린 사람

허지웅 살고 싶다는 농담 위즈덤하우ㅅ

 

고통이란 계량화되지 않고 비교할 수 없다.


오랫동안 불행에 시달리면, 불행으로 인한 상처가 곧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버리곤 한다. 결코 잊지 못할 기억이나 상처의 편린들이 한 사람을 우울감으로 잠식시키는 건 순식간에 벌어진다. 인간이란 한편으로 이기적이고 못된 습성을 지녔지만, 한편으론 이렇게나 나약한 존재인 것이다. 상처에 오랫동안 골몰된 인간은 불행에 허덕이다가, 분노하다가, 극복하려는 노력도 한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극복에 성공하지 못한 채 자조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 자신의 상처는 너무나 특별하고 아픈 것이라 차마 극복하기엔 감당이 안 되는 것이다. 타인이 볼 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의 상처는 당사자에게 그 정도가 아닌 게 아니고, 운이 따르지 않을 경우 그 고통은 평생을 따라 붙을 것이다.


상처 받고 않기 위해 선택하는 위악과 위선


저자 자신은 젊은 시절 상처와 불행으로 인해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혼자 버티려 했고 타인에 기대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정체되었다고 말한다. 즉 과거의 그는 자신과 타인을 완전히 분리시킨 채 자신의 테두리를 무장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타인과 나의 거리를 제대로 가늠만 한다면 그 거리 안에서 서로에게 기대고 도움을 주는 모습을 지향한다.



 개인적으로 고백하건대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어쩌면 나는 작가 어린 시절의 모습을 밟아가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나는 결국 사람은 남이라 생각하고, 타인에게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믿는다. 인간은 타인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때로 인간은 자기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 따라서 타인을 온전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으며, 타인에 대한 오만일 뿐이다. 물론 타인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 기대하고 도움을 주고받아야 하는 건 아니다. 이해할 수 없어도 인간은 인간에게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상처 받고 싶지 않고, 속이 시끄러운 것보다 외로운 게 낫다고 믿는 편이다. 때때로 나도 사람한테 기대하면서 사람한테 실망하는 양가감정을 느낀다. 참 바보 같다고 느끼지만, 나란 사람은 그렇다. 이로 인해 외로움을 느끼는 건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사실 혼자 있든, 같이 있든 인간 존재적인 내면의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차라리 혼자인 게 덜 비참하지 않은가. 적어도 지금의 내 생각은 그렇다. 사람한테 마음을 주고 싶지 않다. 마음을 내준다는 게 얼마나 위험하다는 걸 이제는 알기에...



"푹 자고 일어나 샤워를 한다고 해서 씻겨 내려가지 않는 것들이 있다"

p.39    



나를 나로부터 분리시킨다니?


“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다.” 저자는, 자기 자신의 불행에 도취되어 피해의식에 시달리거나 자조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한다. 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니까. 상처를, 그리고 본인 자신을 심리적으로 물리적으로 객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의할 수 없었다.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다만 냉소적이고 이성적인 척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자기 방어 기제를 놓지 않는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인지할 수 있지만, 가능하지 않은 방법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왜냐하면 나 역시 자기 객관화를 잘한다고 믿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실패였다는 걸 얼마 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결국 이기적이고, 자신을 온전히 객관화하며 바라볼 수 없다. 특히 오랫동안 골몰된 상처나 불행 앞에서는.


당신이 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만약 “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니까”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그게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지는 못할 것 같다. 살고 싶은 이유도, 목적도 없고 증명해내고 싶은 행복도 없다. 단지 버티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한 명으로 있을 뿐이다. 살아가는 이유, 아니 살아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저자의 생각이 궁금했다. “죽지 말아요, 그래도 살아요” 라는 따위의 이야기를 할 분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살아야만 하는 저자 자신만의 이유가 궁금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 살아야만 하는 이유는 결국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었다.



#허지웅 #살고싶다는농담 #21세기북스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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