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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연 Dec 01. 2020

김금희의 「복자에게」를 읽고 나서(시간)

힘들 때, 결국 자신이 편리한 대로 생각하는 보통의 사람들


복자에게, 김금희, 문학동네


나, 이영초롱은 서울에서 판사로 재직하다가 언행 문제로 인해 제주 관사로 내려가게 된다. 유년 시절 제주시의 ‘고고리섬’에서 1년을 보냈던 ‘나’는 그곳에서 복자를 다시 만나게 되고, 복자가 소송한 행정사건의 판사가 된다. 복자는 제주의 영광병원에서 간호사로 재직하였는데, 산재로 인해 유산하였고 이를 방관한 병원에 책임을 묻는 소송을 걸었다. 


표면으로 드러나는 중심 사건은 산재 소송 사건이다. 하지만 소설 「복자에게」를 읽으면서 내가 주목했던 건 사람과 세상에 대한 각 인물의 태도였다.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떠올리게 되었다. 영초롱과 복자는 유년시절 깊은 유대 관계를 형성했던 친구였다. 하지만 한 순간의 사건으로 인해 영초롱과 복자는 멀어지고, 영초롱이 ‘고고리섬’을 떠날 때까지 말을 섞지 않게 된다. 


진실 그자체는 항상 옳을까


 작은 공동체인 고고리섬의 주민들은 내부 수리 문제를 한꺼번에 모아 공사를 한다. 복자가 좋아한 이선이모는 한 명의 수리공과 애착 관계를 맺게 되고, 수리공이 무상으로 이선이모 가게의 화장실을 수리하려 했다. 복자는 마을 사람들이 물어도 절대 말하지 말라고 내게 부탁했는데, ‘나’는 목격한 그대로를 진실로 토해냈다. ‘고고리섬’의 마을 사람들은 작은 공동체로서 집단의식과 소속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이었고, 수리공뿐만 아니라 이선이모를 비난했다. ‘나’는 사실을 말했지만, 그건 누군가에게 약점으로 작용해 상처를 준 것이다. 진실 그자체가 옳음을 입증하거나,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는 게 세상의 순리였다.


다시 만나면 그때 그 느낌 그대로일까?



"사람들은 말이다, 맘이 있지? 그러면 절대적으로 반응이라는 것을 해.그리고 시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늘 범위안에 있어."p.123


이후 ‘나’는 판사로서 제주 관사로 내려갈 때 복자를 만나게 된다. 자기자신의 목적과 이해관계를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는 시점에서 다시 재회하게 된다. 복자는 자신의 소송이 불리하게 작용해 패소할 것을 두려워한다. 어쩌면 패소할 경우를 두려워해 ‘나’에게 사건에서 물러나달라고 부탁한다고 말까지 한다. ‘나’는 직업 판사로서의 일에 대한 침범을 용납하지 않고, 타인 역시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고 평가한다.


사람은 힘들 때, 결국 자신을 편하게 하는 선택을 한다. 그래야 자신을 덜 다치게 하면서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건대, 복자가 겪은 산재로 인한 아픔, 상처는 보상이 필요하고, 복자의 주장은 옳다고 말할 수 있다. 잘못된 사회를 지적하고 이를 꼬집으려는 복자는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가치 있는 행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상처, 신념을 지키는 게 너무 큰 나머지 ‘나’에게 중요한 것들을 얕게 보고 물러나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리고 ‘나’는 복자에게 “선을 넘었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결국 모든 사람은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고 세상의 순리가 그렇다며 일반화시킨다. 그래야 ‘나’는 자신의 행동와 생각이 정당화되고 이해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가역성은 인간 영역의 밖이다.


나는 복자도, 영초롱도 이해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안타깝지만 결국 사람은 힘들 때 자기 자신외 모든 것들을 주변부로 인식하며 마치 큰 정의와 작은 정의가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것 같다. 어쩌면 사람이란, 내가 하는 행동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아니 이해받기 위해서는 타인의 흠결을 찾는 게 더 쉽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당연하게도, 애틋함과 추억이 주는 산뜻함에도 불구하고 예전 어느 시점처럼 같이 있을 수 없다. 


‘나’와 ‘복자’는 이제는 그런 일에 함께 속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복자의 소송 사건이 없었더라면? 아니 없었더라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흐른 두 사람은 주어진 현실에서 각자 원하는 방향대로 삶을 이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쓰쿠루와 그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타인을 흠결내지 않고 자신을 지켜가며 살아가는 사람을 있을까, 라고 생각해본다.


#복자에게 #김금희 #문학동네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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