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기억 속에서 남편을 지워버릴 수 있을 것 같아.
지난 1월부터 바다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설 연휴에 바다를 보러 갈까 생각도 했지만 쉽게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아서 실현하지 못했다. 회사에 매이고 일에 치이니 어느새 4월이 왔다.
사실 지난 토요일 이후에 또 공황발작이 찾아왔다. 앞으로의 이혼 과정이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 불안해졌다.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이혼 때문에 아까운 내 청춘을 이렇게 속박되어 살아야 한다니 끔찍했다.
이미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법적으로도 피해를 한두 개 본 게 아닌데 소송 이혼으로 싸우면서 스스로에게 스트레스를 더 퍼붓고 싶지 않다. 그를 사회적으로 유책 배우자라고 낙인찍기 위해 내가 허비해야 되는 시간적 손해와 감정적 손해를 고려하면 보상에 대해서만 논하는 조정이혼이 가장 빠른 지름길임이 틀림없다.
어차피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세상이 안다. 또 내 글을 읽어주는 많은 독자들이 안다. 홍길동이 얼마나 잘못했고 잘못된 사람인지. 나는 내 사랑에 떳떳하다. 남편을 사랑했던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다. 그래서 지금도 브런치에 남편을 비방하지 않고 나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내 감정을 꾸준히 살피고 마음을 헤아려본다. 미친년이 된 어느 날도 남편을 저주하고 시댁을 증오하지만 결국 남 이야기가 아니라 그 감정이 비롯된 내 마음에 대해서만 말한다. 나는 나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내 못난 모습과 나약한 감정과 슬픔조차도 오롯이 사랑한다.
매일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글쓰기에도 탄력이 붙은 건 당연하고 아무래도 마음의 근육도 더 탄탄해진 걸까. 몇 달 만에 공황발작이 다시 찾아왔지만 이게 어디서 온 건지 이유를 알고 나에 대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 생각보다 금방 잠잠해졌다. 그리고 스스로 처방까지 내렸다. 지금은 자연에 기대어 쉬어야 하는구나. 급하게 휴가를 냈다. 어딘가로 당장 떠나야 할 것 같았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지리산이었다. 화엄사에 가서 각황전 불상을 보고 절을 하면 마음이 진정될 것 같았다. 3000배는 힘들고 1000배 정도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상황을 절반 정도 알고 있는 젊은 스님 친구를 지금 보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은 철저히 혼자 있고 싶었다. 그래서 쏘카를 빌리고 강원도 어느 인적 드문 바닷가의 반려견 동반 펜션을 예약했다. 당일 예약으로 차를 빌리고 숙소를 찾는 것 모두 오늘 아침 순식간에 결정된 일이었다. 즉흥력과 실행력 하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나였다. 아무리 우울에 절어있어도 아직 은연주 살아있네, 어디 안 갔네 원래 성격.
강아지를 입양하고 처음으로 함께 떠나는 여행이었다. 나도 오랫동안 바다를 보고 싶었고 강아지에게도 견생 첫 바다를 보여주고 싶었다. 멍육아라는 말답게 사람 아기도 아닌데 내 짐보다 강아지 짐이 더 많았다. 쏘카를 처음 빌려보는 거나 마차가지라서 시스템이 익숙하지 않았다. 버벅거리며 앱으로 차문을 열고 트렁크에 강아지 짐을 싣고 출발했다. 어디로 갈지 고민하다가 역시 서울에서 제일 만만한 곳인 강원도로 정했다. 동해의 탁 트이고 깊은 바다를 보고 싶었다.
이왕이면 파도가 나를 압도할 정도로 거세게 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양양을 향해 달렸다. 경기도를 벗어나자마자 차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휴게소에 한 번도 들르지 않고 쭉 운전하며 텅 빈 유령 고속도로를 보고 생각했다. 영동 고속도로가 이렇게 텅텅 빈 적이 언제였더라. 기억을 더듬었다. 내 모든 기억 속에는 아직 그가 살아 숨 쉰다.
그와 처음 만난 해의 연말에 해넘이를 양양에서 봤다. 그는 양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동해는 한겨울에 파도가 제일 좋다고, 여름휴가에 양양으로 서핑 가는 사람들은 다 초보라며 진짜 서핑에 미친 서퍼는 한겨울에 탄다고 말했다. 에이 설마, 서핑 때문에 얼어 뒤질 일 있어? 서핑을 하지 않는 나는 그의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 다음날 새해 첫 일출을 보기 위해 일찍 일어났는데 남편이 자리에 없었다. 화장실 간 줄 알고 한참을 기다려도 그는 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일출을 놓칠까 봐 나 혼자 강아지를 데리고 나와서 해돋이 사진을 찍고 있는데 카메라에 뭔가 이상한 검은 물체가 잡혔다.
해수욕장에서 일출을 기다리는 수많은 인파들이 수군대며 '우와 저 사람 이 추위에 서핑하는 거야?' 하고 신기하다는 듯이 사진을 찍었다. '저 사람'이 내 남편이었다. 남편은 서핑 보드 위에서 넋 놓고 해돋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중에 덜덜 떨며 바다에서 나온 남편에게 얼어 죽으려고 작정했냐며 타박을 했다. 난로 위에 미리 끓여놓은 뱅쇼를 그에게 건넸다.
"오빠 진짜 그러다 심장마비 와. 미쳤어?"
"아니 추워서 일찍 일어났는데 밖에 나가보니 진짜 놓치기 아까운 파도가 들어오는 거야. 한두 번만 타고 해돋이는 너랑 같이 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해가 너무 순식간에 금방 떠올랐어."
서핑을 좋아하는 남편 때문에 양양을 정말 많이 왔다. 서울-양양 고속도로가 개통된 뒤에 양양이 더 가까워져서 자주 왔다. 강원도에서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곳은 고성 아니면 삼척이었지만 너무 멀어서 주로 양양이나 속초를 갔다. 강릉은 너무 대도시라서 우리의 구미를 당기지 못했다.
남편과의 추억이 제일 많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곳에 정면 돌파하듯 용감무쌍하게 쏘카를 빌려서 갑자기 떠난 당일여행. 해지기 전에 일찍 도착했지만 사실 용기가 나지 않아서 바다를 보러 가지 않았다. 반려견 동반 펜션 중에 가장 저렴한 곳으로 예약했다. 가성비 숙소가 절대 오션뷰일리 없지. 저녁을 먹고 운동장에서 신나게 뛰노는 강아지를 지켜봤다.
내일은 해가 뜨면 바다를 보러 가야지. 그리고 남편을 하나씩 지워야지. 어쩌면 그와 함께한 추억이 묻어있는 곳들을 새로운 추억으로 덮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양양에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려면 정말로 차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강아지랑 이곳저곳 놀러 다니려면 차가 필요하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알아보는 게 귀찮아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빨리 차를 사야지. 그래서 남편이랑 같이 다녔던 곳들을 다시 가서 하나씩 지워야지. 그의 흔적을 삭제할 수 없다면 새로운 기억으로 덮는 게 최선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를 사자. 어서 빨리. 언제든 기억으로부터 도망갈 수 있게. 다시 출발할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