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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가족공원에서 떠올린 가족의 단상

남편이 말하는 '좋은 가족'은 대체 어디 있는 건데?

by 은연주


강아지 산책을 하러 용산가족공원에 다녀왔다. 서울에서 한강공원 잠원지구 다음으로 제일 좋아하는 공원이다. 미세먼지가 조금 있었지만 그래도 날은 맑았고 한낮에는 조금 덥다 싶을 만큼 햇살이 좋았다. 딱 꽃놀이 가기 적당한 봄날씨.


그래서인지 공원에는 주말 꽃놀이를 나온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이제 막 시작하는 연인들은 물론이고 생애 첫 벚꽃을 보여주기 위해 신생아를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노부부, 엄마 아빠 아이들까지 총출동. 온갖 형태의 가족을 볼 수 있었다.




다행히 나와 함께해 준 친구들이 있어서 외롭지는 않았지만 그 장소에 묘하게 이질감이 들었다. 수많은 가족을 보며 각자의 이야기를 상상해 봤다. 세상엔 많은 형태의 가족이 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부모님이 이혼한 친구들을 보기 쉽지 않았다. 그때는 일하는 엄마를 찾아보기도 힘든 시절이긴 했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완전히 자리 잡은 직후의 세대였다.


엄마 아빠와 다 떨어지고 할머니 손에 자라는 아이는 한 학년에 한 두 명 될까 말까 할 정도였다. 내가 자란 동네는 비교적 생활 소득과 부모의 학력이 높아서 그런 걸 수도 있다. 내가 초등학생 때만 해도 40대 기준 평균 학력이 가장 높은 도시 1, 2위에 꼽히는 동네였다.



이제는 싱글맘 싱글대디 가족도 흔하고 다문화 가족은 많다. 동성 가족도 있고 나처럼 1인 가구도 있다. 나도 엄연히 토끼 같은 나를 책임지고 먹여 살리는 1인 가구의 가장인 셈이다. 그럼 남편에게 가족이란 대체 어떤 존재일까 궁금해졌다. 남편의 가족 기능 평가의 원점수가 0점으로 나왔다. 남편에게 복합적인 성격장애 유형이 있다는 것보다도 가족 기능이 아예 발달하지 않았다는 점이 훨씬 충격이었다. 게다가 가족 책임감도 0점이었다. 그러니 나를 이렇게 버렸겠지. 그는 결혼 2주 만에 쿠팡 로켓와우 무료 반품하듯 이혼 버튼을 누르고 이 결혼에서 스스로 로그아웃해 버렸다.


마치 가상의 게임 세계에 접속하듯 계속 남편의 입장이 되어 그의 인생을 상상해 봤다. 남편에게 가족은 정말 뭘까.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어떤 부모였을까. 이런 물음을 던지며 상상으로나마 그를 이해해 보고자 노력했다.


이 세상 모두가 똑같이 처음 살아보는 인생 1 회차라서 엄마 아빠라는 역할도 처음이듯이 시부모님도 특별히 이상하고 나쁜 부모가 아니었다. 내가 그분들의 진짜 자식이 아니어도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눈이라는 게 있고, 그보다 먼저 인생을 살아온 어른들이 말하는 인상이라는 게 있다.




나이가 들면 살면서 걸어온 길이 얼굴에 다 새겨진다, 그게 인상이고 관상이란다. 평생 사업을 크게 한 외할아버지가 내게 해준 말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옛말에 사주 좋은 사람은 운 좋은 사람을 못 이기고, 운 좋은 사람은 관상 좋은 사람을 못 이긴다는 것을 믿었다. 내가 태어날 때쯤에는 연로하셔서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지역 사회 공헌에만 힘쓰셨다. "관상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야, 네가 살아가면서 걷는 길과 행하는 모든 것들이 얼굴에 새겨지는 거지. 복은 받는 게 아니라 짓는 거야.“




남편은 연애 시절 내내 너희 집은 화목해서 좋겠다고, 부럽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우리 집이 화목한가? 화목의 기준을 어떻게 두냐에 따라 우리 집은 화목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우리 딸 사랑해요~하고 닭살 돋는 멘트를 날리는 게 화목의 기준이라면 아빠는 남편 못지않게 무뚝뚝했다. 하지만 화목의 기준을 외부에 두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화목이라는 것도 결국 내가 생각하고 느끼기 나름 아닌가.


동갑내기 엄마 아빠는 아직도 유치하게 정말 별 것도 아닌 걸로 투닥투닥 싸운다. 어릴 때는 그런 엄마 아빠의 유치한 말싸움이 이해가 안 됐다가 지금은 엄마 아빠는 아직도 서로 많이 사랑하네 하고 생각을 바꿨다. 그래서 하루는 평소처럼 너희 집은 화목해서 좋겠다고 말하는 남편에게 말했다.


"오빠, 근데 화목한 가족을 원하면 오빠가 그렇게 만들려고 노력하면 되는 거잖아. 내가 오빠랑 결혼하면 도와줄게. 같이 만들면 되지, 화목한 가족."


하지만 남편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 부모와 형제들을 흉보기 바빴다. 나는 시답잖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어휴 저 바보, 못나고 미련한 놈. 남자는 애 아니면 개라더니 내가 고른 남자는 애구나. 내가 알아서 잘해야 될 일이 또 하나 늘었네 하고 체념했다.




그는 지금도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고 있다. 자기 아버지를 권위적이고 위선적이라 표현했다. 엄마가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남의 엄마로 낙인찍더니 곧 스스로 부모와의 모든 관계를 철회하는 남편. 시부모님은 아들을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해서 자기 부모를 천하의 나쁜 부모로 매도하고 스스로 가족을 버리는 남자. 그가 생각하는 좋은 엄마 아빠란 무엇이고 좋은 가족은 대체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나는 그의 거짓말에 깜빡 속아 넘어가서 측은한 마음으로 내가 다정하고 화목한 가족이 뭔지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남편을 뺀 그의 나머지 가족들은 이미 좋은 가족이라는 것을. 아픈 아들을 어떻게든 치료하겠다고 계속 회의를 하는 자기 부모 형제의 마음을 본인만 모른다. 당사자가 아닌 피해자인 나만 그의 가족의 초상을 이해하고 있는 이 현실이 몹시 모순적이다.


원래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고 했었나. 남편이 정답처럼 외우고 있는 사랑 말고 그가 진실로 느끼는 진짜 사랑은 대체 무엇일까. 한 가족의 붕괴를 초근접 상태로 지켜보니 어렴풋이 알겠다. 가족은 사랑과 믿음, 희생, 배려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신념의 영역이라는 것을. 그래서 남편의 가족 기능 평가 점수가 0점 나왔나 보다.




용산가족공원을 다 빠져나올 때까지 이 세상 가족들이 다 놀러 나온 듯 차도 사람도 계속 밀물처럼 몰려왔다. 내가 스스로 선택한 최초의 가족은 대실패로 끝났지만 나는 과연 앞으로 어떤 가족의 형태로 살게 될지 궁금하다.


이 정도 큰 상처를 받아놓고 멀쩡하게 금방 잊고 아무렇지 않게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재혼을 꿈꾸진 않는다. 솔직하게 나는 남편으로 인해 인간에 대한 불신과 혐오로 온통 뒤덮여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동물이기에 가족을 이루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도 이만큼 당하고도 가족의 사랑을 믿는다. 내가 무너지고 쓰러져도 죽지 않고 오히려 더 단단해지는 이유는 나의 뿌리, 가족 덕분이다. 시간이 지나고 내게 다시 한번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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