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아주 짧게 잘랐다.
내가 다녔던 중고등학교는 두발 규제가 없었다. 적당히 학생다운 단정한 머리면 됐다. 학생 주임 선생님은 지나친 염색, 화려한 파마인 애들만 잡았다. 인근 다른 학교는 '귀밑 몇 센티' 이렇게 칼 같은 규정이 있어서 우리 학교는 비교적 여유로운 학교였다. 요즘이야 학생 인권 침해라는 명목 때문에 두발 규제 같은 건 옛말이고 학생들이 화장도 염색도 파마도 다 하는 세상이지만 우리 때는 그런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내 머리 길이는 한평생 가슴선을 유지했다. 기껏 변화를 주고 싶다고 잘라봤자 어깨 길이의 중단발. 그나마도 먼저 말 안 하면 아무도 못 알아볼 정도로 소심하게 잘랐다.
자기 개성을 마음껏 펼치기 좋은 시대라지만 나는 언제나 평범을 고수했다. 동생은 나와 정반대라서 옷을 입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입고 대학생 때는 머리카락도 보라색, 분홍색으로 염색하곤 했다. 개성 있는 동생은 나를 항상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는 스타일이라고 평했다. 솔직히 나는 이 나이 먹도록 내 스타일이 뭔지 모르겠어서 늘 무난한 것만 추구하는 '무나니스트'였다. 옷장에 블랙, 화이트, 그레이만 있으면 그래도 촌스럽지 않게 중간은 간다고 믿었다.
회사를 다니니 화려하게 꾸밀 수 없다는 말을 했으나 그건 내가 생각해도 핑계였다. 직장에는 팔뚝에 타투 여러 개를 하거나 코에 피어싱을 하고 출근하는 사람들도 허다했다. 하기야 한여름 출근길에 주위를 둘러보면 반바지에 크록스를 신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 세상이긴 하다. 그럼에도 나는 늘 개성을 감추는데 급급했다. 엄마는 내가 애기 때부터 늘 말했다. "넌 화려하게 생겨서 가만히 있어도 눈에 띄니깐 꾸미지 마." 엄마의 바람대로 나는 평범한 스타일을 고수하는 K-장녀로 자랐다.
어린이날에 이어 석가탄신일에도 비가 오다니. 차라리 잘 됐다. 놀러 가기 좋은 주말에도 공휴일에도 궂은 날씨면 내심 기뻤다. 그렇지 않아도 날씨파였던 내가 더 이상 새파란 하늘에 쾌청한 날씨를 보아도 설레지 않는다. 오늘은 그래도 쉬는 날인데 모처럼 일정이 있었다. 큰맘 먹고 머리를 확 자르겠다며 미용실을 예약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짧은 단발머리를 할 계획이었다. "처음 단발하는 거니깐 이 만큼만 자를까요?" 미용사가 안전하게 이 정도 기장 어떻냐고 내 머리카락을 턱끝에 맞춰 거울에 비췄다. "아뇨, 더 짧게... 완전 짧게요. 귀 밑으로 바짝 자르면 못 생겨 보일까요?"
"아뇨 잘 어울릴 것 같아요. 후회 안 하겠어요? 그럼 자를게요."
싹-----둑-------
가위날이 맞물리는 소리가 경쾌하다. 과감한 미용사의 손놀림에 무거웠던 머리가 가벼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출가는 못 해도, 민머리는 못 해도 이만큼 자르면 내 업보도 조금은 날아가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양손으로 잡아봐도 묶이는 시늉조차 할 수 없는 아주 짧은 머리. 거울 속 내 모습이 어색하다. 어색하게 셀카를 찍어 동생에게 보냈다. '어때? 나 어려 보여?' 동생은 힙스터 같아졌다며 요즘 애들 머리 같다고 칭찬해 줬다. 하지만 내 눈에는 머리카락만 힙스터 같고 얼굴은 영 글렀네. 거울 속 진지한 눈깔엔 여전히 우수가 가득 차있다. 이 고통은 언제 끝이 나려나. 1년이 지나면 눈물도 씨가 마를 줄 알았는데 이제 슬픔도 관성이 되어 우울과 공생하는 망가진 한 인간이 거울 앞에 서있다.
홍길동과의 인연을 잘라내고 싶은 마음으로.
모든 걸 뒤로 하고 새 인생을 살고 싶은 마음으로.
출가하는 심정으로 머리를 짧게 자르고 곧장 봉은사에 갔다. 비바람이 거센 날씨에도 관불의식 줄이 끝없었다. 부처님 오심을 찬탄하는 중생들 사이에 껴서 어쩔 줄 모르다가 대웅전 앞 처마 끝에서 빗소리만 듣고 발길을 돌렸다. 그럭저럭 머리카락 하나 잘랐을 뿐인데 마음속 커다란 돌덩이 하나를 내려놓은 마음이다. 머리를 자르며 내가 무엇을 결심했는지 나도 모르겠지만 그 결의가 부디 나를 지켜주길.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