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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진짜 미친년이 된 것 같아요.

감정이 완전히 고장 나서 A/S도 안 되면 어떡하죠.

by 은연주

병원에 가서 한 주간 있었던 일들과 나의 기분을 얘기했다. 요즘의 나는 기분 변화가 전광석화처럼 잦아서 이러다 내가 정말 ‘진짜 미친년’이 될까 봐 무섭다.




남편이 안쓰럽고 궁금하고 보고 싶다가도, 남편을 사랑하고 믿었던 만큼 죽여버리고 싶다. 남편이 자아성찰을 하고 반성해서 새 사람이 되었으면 싶다가도, 차라리 평생 지금처럼 불행하고 비참하게 살라고 저주를 퍼붓고 싶기도 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남편을 위해서 좋은 병원이나 유명한 가족치료 센터를 열심히 찾는다. 그러다가 나랑 우리 가족에게는 이런 큰 우환을 줘서 병들게 만들고 정작 시댁은 가족치료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억울함이나 분노 따위의 감정이 끈적하게 뒤엉킨다. 뒤돌아서면 기분이 바뀐다. 체감상 1분 단위로 감정이 계속 바뀌는 것 같다.




미처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감정기복이 두렵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일과 거기서 파생되는 모든 기분은 살아생전 경험해 본 적도 없고 상상해 볼 수도 없는 영역이라서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이 엄동설한에 길거리로 빨가벗고 뛰쳐나가 나의 억울함을, 황당함을 외쳐서라도 이 슬픔을 알리고 싶은데 그래봤자 나만 아는 서러움이라는 사실이 나를 짓누를 때도 있다. 남들 눈에는 그저 미친년, 불쌍한 사람, 정신병자로 보일 테니.




“선생님 저 진짜 이러다가 정말 미친년 되면 어떡해요? 큰 충격에 정신줄 놓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렇게 되면 어떡해요? 조울증이나 조현병 오면 어떡해요?”


“저는 OO씨의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 아니 이해하다 못해 오히려 OO씨가 너무 짠해요. 그만큼 힘들구나, 믿었던 남편에게 그만큼 배신당했구나. 누가 이해하겠어요 OO씨가 겪은 일을. 남들은 아무도 이해 못 해요. 남이라서. 그렇지만 지금 느끼시는 감정들은 다 자연스러운 거라고 제가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그러니깐 절대 미친년 될 일 없으시니깐, 겁먹지 않으셔도 돼요.”


“오히려 OO씨는 제 다른 환자분들보다도 훨씬 담담하고 침착하신 편이에요. 자기 관찰 너무 잘하고 계세요.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다른 환자분도 OO씨보다 더 심하게 감정 널뛰기하고 힘들어하세요. 무슨 사연이 더 크고 중하다가 아니라, OO씨는 그래도 심지가 굳고 회복탄력성이 높은 분이라는 걸 말씀드리는 거예요. 이렇게 자기감정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느끼려고 하시잖아요. 원래 외면하고 회피하는 게 제일 쉽거든요. 잘하고 계신 거예요. 그리고 이만큼 힘들어하는 게 너무 짠해서 제가 안아주고 싶어요.”




한 달 전쯤, 고등학교 시절 내내 붙어 다녔던 영혼의 단짝 같은 친구에게 그간의 일들을 털어놓았던 날. 친구가 이야기를 듣다 말고 자기 휴대폰으로 뭔가 확인하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너 내 꿈에 나왔었어, 나 이거 꿈으로 미리 안 것 같아.”


지난여름 어느 날, 친구는 꿈에서 나를 배웅했는데, 내가 탄 차가 거의 출발하자마자 교통사고가 크게 났다고 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차에 불이 붙어서 내가 죽는 걸 눈앞에서 봤다고 했다. 내 친구는 평소에 꿈을 잘 꾸지 않는 편이다. 그리고 독실한 기독교인이라서 미신을 믿지도 않는다.


꿈에서 깼는데도 너무 생생하고 무서워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꿈 얘기를 하고 계속 내 걱정을 했다고 한다. 친구의 어머니는 행여나 외국에 있는 내가 멀리서 그런 꿈 얘기를 들으면 괜히 걱정만 되고 찝찝할 테니 절대 말하지 말라고, 대신 차라리 잘 지내냐고 안부 문자를 넣어보라고 하셨다.


친구는 내게 문자를 보냈다. “거기서 잘 지내고 있지?“

그날은 하필 내가 시어머니 손에 이끌려 도망치듯 한국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내가 탄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막 착륙하자마자 휴대폰 전원을 켜고 처음 본 문자였다. “응 난 잘 지내지. 근데 여기 너무 더워 죽겠어. 한국도 많이 덥다며?”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친구의 꿈이 만약 예지몽이었다면, 그녀의 꿈처럼 정말 내 정신이 죽기라도 한 거라면, 그럼 지금 텅 빈 내 마음속에 기생하는 이 감정의 실체는 무엇인지 알고 싶다. 건강한 감정 체계를 되찾고 싶다.


어차피 죽지 못해 살아야 한다면, 공포에 잠식되어 겁에 질린 껍데기 말고, 밝고 건강했던 내 감정을 온전히 느끼며 살고 싶다. 남편이 너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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