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껏 아파하자, 아직은 좀 더 우울을 즐겨도 된다.
OO아, 올 한 해 우리에게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 너한테는 유독 세찬 바람이 불었던 때 같아. 내가 아는 너는 어떤 장애물을 만나 넘어지더라도 훌훌 털고 금방 일어서서 너의 길을 가던 친구였어. 이번에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거라 믿어. 다만 혼자서 이겨내는 게 아니라 주변 모두가 너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바람은 결국 지나가기 마련이잖아. 우리 굳세게 옷깃을 여미고 가야 할 길을 가자. 2024년에는 정말로 좋은 일들만 있을 거라 확신해. 새로 가는 직장에서 좋은 사람들만 만나서 행복한 한 해를 보내자. 항상 응원하고 기도할게. 2023년의 마지막을 함께 보낼 수 있어서 감사해.
OO아, 친구로 지낸 지 20년 가까이 되어가는데 이제야 편지를 써보네. 글재주는 없지만 마음을 담아서 표현해 본다. 똑 부러지면서도 한없이 따뜻한 마음을 가진 너를 친구로 두어서 너무 좋아. 힘든 일 있으면 같이 울어주고 좋은 일 있으면 누구보다 더 축하해 주는 우리 사이가, 해가 갈수록 돈독해지는 것을 느껴. 이제 마음 다칠 일 없이 행복해질 일만 남았다. 2024년에도 우리 잘 지내고 같이 행복하자. 무슨 일 있어도 너의 편이야.
어제는 유일무이한 송년회가 있었다. 송년회라고 해봤자 여자 셋이서 마포구의 깔끔한 에어비앤비를 빌려 떡볶이랑 치킨을 시켜 먹은 게 전부지만. 술도 안 마시는 친구들이라서 고3 때처럼 열심히 말없이 음식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연말 기분을 내기 위해서 서로 편지와 작은 선물을 교환했다. 해리포터 1편을 틀어놓고선 5분 만에 뜨거운 방바닥에 녹아 그대로 잠들었는데, 저녁약을 까먹어서 새벽에 잠깐 깼을 때 내 옆에 나란히 잠들어있는 친구들을 보고 마음이 뭉클했다.
나에게는 정말 소중하고 좋은 친구들이 있다. 살면서 항상 인생에 감사하게 느꼈던 부분은 나는 정말 인복이 넘치는 사람이라는 것.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추운 겨울이지만 그래도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들에게서 애정을 느낀다. 나를 살뜰히 챙겨주는 사람들에게서 용기를 얻는다.
비록 인복은 있고 남편 복은 없다는 게 웃기고도 슬프지만, 그깟 남편 복 없으면 뭐 어떠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게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남편보다야 내가 훨씬 더 행복하지 않겠는가.
남편과 연애를 하면서 가끔씩 느껴졌던 그의 고독한 내면이 안쓰러워서 내 손을 건네주었지만, 내가 돌려받은 건 그의 손이 아니라 칼이었다. 사랑이 뭔지 모르는 사람에게 내 사랑을 몽땅 쏟았던 나의 지난 2년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은 지난 반년. 그렇다고 내 사랑이 낭비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잠시 길을 잃고 넘어졌고 많이 아파하고 있지만, 다 낫고 나면 새로운 사람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조심스레 품어본다.
정신과 의사인 친구가 내게 그런 말을 했다. 사람은 항상성으로 굴러가는 것 같다고. 환자가 너무 크게 다치면 코마에 빠지는 것처럼, 우울증은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뇌가 스스로 회복하기 위해서 일부러 정신 기능을 차단하고 잠들어서 에너지를 비축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긍정적인 사고를 하고 평정심을 지키는 것도 사실 항상성을 유지하는 거고, 거기에 정신 에너지를 다 쏟아버리면 상처 회복이 제대로 안 되니깐 그런 기능들을 뇌가 알아서 셧다운 시키는 걸 수도 있다고. 온전히 나아지기 위해서 우울증에 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해줬다.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오래도록 우울증을 앓으리다. 나의 항상성을 지키기 위하여, 온전히 다 나을 때까지. 나는 영영 혼자가 아니고, 나를 사랑하고 응원해 주는 가족과 친구들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해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는 것도, 아주 추운 겨울을 지나야 비로소 봄이 찬란하다는 것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