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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그룹이 변경되었습니다.

'홍길동님은 구글에서 더 이상 가족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by 은연주

<소년시대>라는 드라마를 하루종일 정주행해서 단숨에 끝내버렸다. 총 10부작이니깐 10시간 넘게 쉬지도 않고 화면만 쳐다본 것이다. 이렇게 드라마에 몰입해 본 적이 얼마만이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봤다. 그 옛날 브라운관 시절부터 TV를 별로 안 본 탓에 어른이 된 지금도 OTT를 잘 활용할 줄 모른다. 남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는 국민 드라마, '명드'도 안 본 게 수두룩하다.




한동안 우울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몰입할 수 있는 취미나 새로운 환경, 뭐든 좋으니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그중에서 제일 간편했던 건 완결 드라마 도장 깨기였다.


남편도 <소년시대>를 봤을까? 우리는 넷플릭스 계정을 공유하던 사이였다. 연애 시절부터 자연스레 우리 가족 이름 옆에 남편 이름도 올라가 있었다. 구글도 가족 그룹으로 묶여있어서 내 유튜브 프리미엄 혜택을 같이 썼고, 네이버 플러스 멤버십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 남편과 따로 연락하진 않았지만, 남편의 넷플릭스 프로필로 들어가서 '현재 시청 중인 콘텐츠'로 남편의 안부를 대신 확인하곤 했다. 죽진 않았나 보네, 드라마 볼 정신도 있나 보네.


남편은 그 무렵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그거 내가 같이 보자고 말했던 건데. 드라마 줄거리도 모르는데 꽤 많은 사람들이 인생 드라마라고 하길래 막연하게 다음엔 이거 보자고 몇 번 말했었다. 함께 하기로 한 '투 두 리스트'에 있었던 수많은 것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먼저 모든 구독 서비스에서 '가족 관계'를 끊어버렸다.


구글에서 알림이 왔다. '가족 그룹이 변경됨'

OO님, 안녕하세요. 홍길동님은 구글에서 더 이상 가족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홍길동님은 가족 그룹에서 사용하는 구글 서비스에 더 이상 액세스할 수 없습니다.


지난 10월 말의 일이었다. 남편이 이혼 소장을 접수했다는 소식보다 더 잔인하게 들렸고 슬펐다. 여기에 무슨 의도가 있든 없든, 나는 이해되지 않는 그의 '클릭' 한 번에도 또다시 마음이 무너져버렸다. 내 마음이 백사장에 모래성도 아닌데 자꾸 무너지고 부서지고 깨지는 일들만 반복됐다.




<소년시대>를 보는 동안, 내가 원하지 않아도 남편 생각이 자주 났다. 걸핏하면 평소에도 충청도 사투리를 섞어서 말하던 남자였는데. 드라마를 보는 내내 어설픈 남편의 어설픈 '-겨' 말투가 떠올랐다. 재미 반 습관 반처럼 충청도 사투리를 따라 하던 남편은 은근히 충청도 사람처럼 말하는 재주가 있었다.


우리는 둘 다 야외 활동을 좋아해서 주말엔 무조건 여행이라는 공식이 있을 만큼 집에서 데이트한 적은 별로 없다. 하지만 가끔씩은 집에서 함께 요리를 하고, 드라마 몰아보기를 하면서 푹 쉴 때도 있었다.


그렇게 같이 본 드라마가 <킹덤>, <지옥>, <오징어 게임>, <지금 우리 학교는>. 한 편씩 끊어보는 걸 못하고, 기다리는 걸 싫어해서 무조건 몰아봐야 직성이 풀리는 것도 똑같았다. 어쩌다 보니 대부분 좀비물이거나 잔인하고 무서운 드라마였지만, 그때는 또 그런 게 제일 핫했던 시기였다.




나는 이렇게 아직도 구질구질하게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추억 속의 우리 둘을 그리워한다. 남편이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남편은 쉽게 치료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긍정적으로 변한다 한들 평생이 걸릴 일이다. 내 평생을 갈아 넣어서 그의 변화를 바라는 건 내게 너무 가혹하고 불행한 인생이다.


혹은 원체 지능이 높은 남편이 자기 객관적 인지를 통해 병식이 생겨서 빠른 호전을 보인다 하더라도, 나에게 용서를 구하거나 감정적으로 호소하며 나를 붙잡을 리는 전무하다. 자존심이 센 그는 "그러니깐 더더욱 너를 위해서라도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이혼하는 게 맞아"라고 건조하게 말할 사람이다. 이미 실제로 그렇게 말하기도 했고.


내가 한국으로 돌아오기 며칠 전, 한 달 넘게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던 남편은 드디어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했던 말이 바로 이거였다. "내 이혼 생각은 절대 안 변해. 나는 원래 한 번 정한 건 절대 안 바꿔. 그리고 어차피 사람은 안 변하니깐 나 역시 안 변할 거고, 서로를 위해서 여기서 끝내는 게 맞아." 나를 배려한다는 듯이 이혼을 말했다. 나를 위해서 이혼해 주겠다고 선심 쓰듯이 말했다.


화자도 청자도 우리 둘 뿐이었지만, 그것은 결코 대화가 아니었다. 남편에게 '네가 원래 한 번 정한 건 절대 안 바꾼다는 사람이라면, 이혼 이전에 결혼이 먼전데 왜 그 말을 책임질 생각은 안 하냐'라고 논리적으로 따져 물을 새도 없었다. 두 사람이 하는 대화가 아니라 그의 일방적인 폭행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무방비하게 이혼이라는 습격을 당했다.




여전히 과거에 머물며, 과거를 바라보며 슬픔에 잠겨있는 내가 너무 한심하다. 흘러가버린 시간을 붙잡고 싶어서, 엎어진 물을 주워 담고 싶어서 애쓰는 꼴이 퍽이나 우습다.

재밌는 드라마를 하루 만에 몰아봐 놓고 고작 한다는 감상이 또 남편 생각에 눈물 흘리는 것 밖에 없다는 사실이 한심하다. 나는 정말 질리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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