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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도 크리스마스는 찾아온다.

남편은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내러 여행 갔단다. 날 지옥으로 밀어 넣고.

by 은연주

결혼, 퇴사, 결혼하자마자 해외 이주, 출국 보름 만에 남편의 이혼 요구, 나 홀로 귀국, 별거, 이혼 진행 중. 나의 2023년을 키워드로 표현해 봤다. 이게 보통 사람들에게 쉽게 벌어지는 일인가? 일반인들의 보편적인 상식 선에서 납득이 가능한 일인가? 나는 반년째 정신과를 다니며 약을 먹고 있고, 여전히 내게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받아들이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작년 연말의 나는 신혼집에 둘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를 사고, 우리에게 나름대로 의미 있는 오너먼트로 장식하느라 정신없었다. 그리고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그 해의 추억이 담긴 오너먼트를 하나씩 사 모으기로 남편과 약속했다.


그때 샀던 트리는 이삿짐 컨테이너에 실어서 외국으로 부쳐버렸고, 아직도 그 나라에 남아 있다. 아니면 남편이 진작에 버렸을 수도 있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해외 이사를 했는데, 컨테이너가 도착해서 짐을 인수하기도 전에 남편에게 이혼 통보를 당했다. 캐리어 두 개만 들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크리스마스 트리의 행방은 알 수 없다.




남편과 매년 크리스마스 오너먼트를 모으자고 했던 작년의 약속이 무색하게 혼자 보내는 연말. 다행히 동생들이 나와 함께 해주기로 했다. 아마 우리는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내가 방에 처박아 둔 이삿짐 박스 몇 개를 풀러 정리할 것이다.


‘그 종교‘가 아닌데도 미디어의 영향 때문인지 어린 시절부터 크리스마스를 좋아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 밖은 무진장 추워도 집안은 난방 때문에 공기가 후끈후끈. 재즈 캐럴을 들으면서 요리를 하고, 연휴 내내 배경화면처럼 주야장천 틀어놓는 해리포터 시리즈와 나 홀로 집에 시리즈. 내게 익숙한 크리스마스 풍경이다.


내가 어릴 때부터 엄마는 11월 말이면 크리스마스 트리를 꺼냈다. 저녁마다 반짝이는 전구가 어찌나 예쁘던지 매일 홀린 듯이 구경했다. 엄마는 살림 솜씨가 좋아서 오너먼트를 직접 바느질해서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건 다 기억 저편 과거로 사라져 버렸다. 내가 독립해서 내 가정을 꾸리자마자 나는 혼자가 되어 연말을 보내게 됐다. 이런 그림을 예상하고 결혼한 건 아닌데. 남편은 친한 친구를 만나러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갔고, 거기서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낸다고 얼핏 주워 들었다. 그렇구나. 딱히 화도 나지 않았다. 화내서 뭐 해. 내 심정을 이해하지도 못할 사람인데. 나는 너 때문에 이렇게 인생 최악의 연말을 보내는데. 그걸 너만 모르네.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았던 것 중에 가장 좋아했던 건 백설공주가 그려져 있던 내복이다. 바비 인형을 받은 적도 있고, 외제 색연필을 받은 적도 있고, 초등학교 고학년 때는 CD플레이어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왜 내복이 제일 기억에 남을까? 그냥 마트에서 파는 그런 내복 상하의 세트일 뿐이었는데. 아마 내가 좋아했던 건 그 내복의 보드라운 촉감, 그게 마치 나를 안아주는 엄마의 손길이나 아빠의 다정한 말처럼 느껴져서 그랬던 게 아닐까.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나에게 따뜻한 내복이든 잠옷이든 순면으로 된 소재 좋은 실내복을 선물해야겠다. 비록 그걸 입고 또 집에서 혼자 질질 짜는 한이 있더라도. 아무리 외롭고 힘들어도 연말만큼은 내 자신을 갉아먹지 말자. 안 그래도 집 밖은 북극이라는 말이 와닿을 정도로 추운데, 나까지 스스로에게 차갑게 대해서 뭐 하겠어. 눈 딱 감고 일어나면 천국 아니면 내년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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