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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연주 Jan 17. 2024

서울에 눈이 아주 많이 내린 어느 겨울날

용산구의 어느 병원에서 3.2kg의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오늘도 또 눈이 내렸다. 정말 유난히도 눈이 자주 내리는 겨울인 것 같다. 아빠의 편지에 쓰여있듯이 내가 태어난 날에도 눈이 정말 많이 내렸다고 한다. 몇십 년 만에 내린 폭설 때문에 서울 도심 교통이 완전히 마비됐었다고. 그 시절의 제설 능력은 요즘만큼 뛰어나지 않아서 거리에 차가 한 대도 못 다녔다고 했다. 지금도 인터넷에 '서울 역대 폭설 기록'을 찾아보면 내가 태어난 그 해 겨울이 손에 꼽힌다. 아빠는 눈이 많이 오는 겨울날이면 항상 어김없이 내가 태어난 날 얘기를 꺼냈다.


“너 태어난 날에도 눈이 정말 무지무지하게 많이 내렸어. 길에 차들이 못 다녔어. 거의 30cm는 쌓인 것 같아...” 


온 세상을 고요하게 뒤덮을 만큼 눈이 펑펑 내린 날, 그래서 유난히 내 울음소리는 더 우렁차게 들렸다고 했다. 엄마는 동생들과 비교해 봐도 유독 내 울음소리가 훨씬 컸다고,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처럼 사내자식보다 더 크게 울었다고 그날을 기억한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난 계절을 좋아한다고 하던데 나는 그 말에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추위를 잘 타고 손발이 차가운 나는 어릴 때부터 겨울을 싫어했다. 게다가 건조한 날씨에 정전기는 또 어찌나 잘 나던지. 물을 아무리 많이 마시고 가습기를 켜놔도 차를 탈 때나 옷을 벗을 때, 시도 때도 없이 손 끝에서 정전기가 나는 게 싫었다. 등산을 좋아해도 겨울 산행은 눈이 내렸을 때를 제외하곤 앙상한 나뭇가지에 흐린 하늘까지 볼품없었다. 눈꽃산행이 아니고서야 보온병에 담긴 따뜻한 커피와 컵라면이라도 없었으면 겨울 산행은 영 지루하고 재미없을 뻔했다.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홀로 보냈다. 이혼하자고 날 고소한 남편은 생사조차 모른다. 친구들의 연락도 다 끊어냈다. 누구보다도 추워야 할 겨울인데 의외로 생각만큼 겨울이 싫지 않다. 아니 오히려 조금 추워도 괜찮다. 아마 그건 내가 사랑하는 여름을 음미할 새도 없었듯이 겨울을 싫어할 여유도 없어서 그런 게야,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사무실 창밖으로 펑펑 내리는 눈을 계속 보다 보니 자꾸 내가 태어난 날을 떠올리게 된다. 이틀 내내 밤새 엄마의 진통을 곁에서 지킨 아빠. 첫 손주를 보러 시골에서 올라온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무엇보다 나를 낳고 처음 품에 안았을 땐 왠지 모를 이질감을 느끼다가, 마침내 나와 처음 눈을 맞추고 '아 이 아이는 나의 눈을 그대로 가지고 있구나' 하고 안도감이 들었다던 엄마. 오늘같이 함박눈이 내린 날, 눈처럼 온 세상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3.2kg의 여자아이. 그날을 생각하면 그동안 겨울을 싫어했던 마음이 괜히 겨울한테 미안해진다.




분명 예년 같았으면 '추워 추워'를 입에 달고, 봄은 대체 언제 오냐며 겨울 욕만 했을 텐데. 남편이 낚시 가자고 해도 추워서 싫다고 내뺐을 텐데. 낚시 대신 캠핑만 하자고 졸랐을 텐데. 겨울을 피해서 따뜻한 나라로 도망갈 궁리만 했을 텐데. 그렇지만 지금은 다르다. 세상이 아무리 날 버려도, 세상 구석으로 몰린 기분이 들어도, 내가 믿었던 사랑에게 배신당했어도 괜찮다.


나는 겨울에 태어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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