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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연주 Jan 16. 2024

현재 시각 밤 11시 반, 야근하고 집에 가는 택시 안

오늘도 훌륭한 거짓말쟁이가 되었습니다.


일을 하다 보면 새로 해결해야 되는 문제들이 계속 쌓인다. 새해부터 출근한 지 딱 열흘째. 그중 벌써 8일을 야근했다. 와우! 싫어하는 일은 억지로 꾸역꾸역 하지도 못하는 성격이니, 야근의 이유가 반복적으로 쳐내는 업무의 연장선이 아니라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하지만 내가 계속 고민하고 생각해도 당장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게 아니니 이것도 쉽지는 않다. 게다가 문제 해결까지 주도적으로 끌고 가려면 갈 길이 참 막막하다.




오늘은 하루종일 일 생각만 하느라 일상을 돌아볼 시간이 단 1초도 없었다.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니 내가 일을 통해 우울증도 이겨내고 삶의 의미를 되찾았다면 나는 여기를 바로 훌훌 떠날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평생 일을 할 것이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일‘만' 하고 싶은 사람은 절대 아니다. 일은 당연히 해야 하고 이왕 하는 거 꼭 잘하고 싶지만, 일에만 미쳐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지는 않다. 세상에는 일말고도 아름답고 재미있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래서 여기는 오히려 내가 짧고 굵게 방점을 찍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에 몰입해서 유의미한 결과를 얻고, 남편으로부터 받은 상처에서도 조금이나마 해방된다면 그야말로 살기 위해 발버둥 친 꽤 훌륭한 족적으로 기억될 것이다.




2주 차가 되니 이제 팀원들이 조금씩 남편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신혼이니 궁금한 게 많나 보다. 오늘은 점심을 같이 먹은 동료들이 결혼은 언제 하셨냐, 연애 기간은 얼마나 되냐고 물었다. 그러더니 나는 궁금하지도 않은 자기들의 연애 상담과 결혼 고민에 대해 털어놓았다. 사실 이들의 관심사는 내 결혼 생활이 아니라 본인들의 연애와 결혼 고민이었다. 아, 맞다. 우울증에 땅굴 파다시피 사회와 연을 끊었던 탓에, 연애와 결혼은 남녀노소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꽤 난감했다. 나는 그들에게 결혼에 대해 조언해 줄 수 있는 게 없는데. 나도 결혼을 겪어본 적이 없는걸. 하지만 최대한 둥글게 대답했다.


“음 결혼하면 아무래도 편안함이 생겨서 좋은 것 같아요. 그래서 남편이랑 떨어져 있어도 괜찮아요. 연애 때 롱디였으면 오히려 불안하고 힘들었을 것 같아요. 저는 결혼 추천해요^^”


결혼을 하고 마침내 안정을 찾은 유부녀의 페르소나가 되어 열심히 말했다. 내가 생각해도 기막힌 메소드 연기였다. 사실은 불안정한 남편 때문에 나는 안정감을 잃고 우리 가족의 평화도 깨져버렸는데. 이렇게 가면을 쓰고 사회생활을 잘 해내는 내가 기특하면서도 측은했다.


또 저녁에는 내 옆에서 야근을 같이 하던 다른 직원이 신혼인데 롱디해서 남편이 막 보고 싶거나 힘들지는 않냐고 물었다.


“전혀요! 거기 두고 온 강아지만 보고 싶어요. 저 맨날 강아지 사진 보면서 눈물 흘려요. 어차피 하루종일 일 생각만 하느라 남편 생각할 겨를도 없네요. 하하하”


내 말에 틀린 말은 하나도 없다. 오늘도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지만 내 말에 거짓말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자꾸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 같아 마음이 무척 불편하다. 내가 언제까지 이 상황에 끌려다니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문득 궁금해졌지만, 더 이상 메모리 부족으로 생각을 할 수 없다. 이만 쓰고 얼른 집에 가서 죽은 듯이 자야지. 집에 가는 택시 안에서 비로소 뇌 스위치를 끈다.


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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