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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연주 Jan 14. 2024

삶은 구름 한 조각과 같다.

마치 한 조각 구름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처럼 덧없는 일이다.

生也一片 浮雲起 死也一片 浮雲滅

삶은 구름 한 조각과 같다. 마치 한 조각 구름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처럼 덧없는 일이다.



서산대사가 운명하기 직전 마지막 설법에서 읊은 게송이라고 한다. 이상하게 이 말이 크게 위로처럼 다가왔다.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내는 일이라는 일체유심조가 지난 몇 년간 쭉 내 카카오톡 상태 메시지였다. 하지만 지난여름, 일체유심조를 슬그머니 지워버렸다. 다 아는데도 소용없었다.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시간이 약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나. 누구나 다 아는 진실이지만 진실을 안다고 해서 현생에 도움이 되는 건 전혀 아니었다. 그런 진실 몇 줄에 괜찮을 세상이었으면 정신과는 왜 있고 상담센터는 왜 있으며, 왜 하루에도 수많은 목숨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나. 전혀 새롭지 않은 위로의 문장들이 나의 상처 난 마음을 가볍게 빗겨나갔다. 그것도 여러 번.




남편과의 일이 있고 난 후에 읽은 책들은 거의 철학, 심리, 역사서, 그도 아니면 남편의 병증에 대한 의학서였다. 현대어로 번역된 불경도 몇 번 읽어봤는데 어려워서 중도 포기한 책들도 꽤 있다. 과거 현인들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뭐라도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전에는 주로 소설을 즐겨 읽던 나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최근에는 소설은 손에 안 잡혀서 이젠 아주 끊다시피 했다. 아무래도 소설은 내 상상력을 쓰면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해 나가야 하는데, 아직 내 마음속엔 그 정도의 에너지나 공간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약을 입에 털어 넣으면 무기력이 아주 조금 나아지지만 예전만큼 에너지가 쌩쌩하진 않다. 등산할 때 날다람쥐 소리를 듣던 나였는데 요즘엔 고작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숨이 벅찬다. 요가원에 발을 디디지 못한 지도 역시 한참 됐다. 온몸의 근육이 다 물러졌다. 거울 속 내 모습을 볼 때마다 속상했다.




나를 아껴주고 걱정해 주는 친구들은 계속 내 주변에 맴돌며 나를 보살펴준다. 동생은 주말마다 내가 있는 동네로 와서 같이 하루를 보내줬다. 나를 밖으로 불러낼 이유를 자꾸 만들었다. 곧 친구들과 일본에 놀러 갈 때 입을 옷을 사야 한다는 동생을 따라 2주 연속 쇼핑을 같이 했다. 확실히 혼자 있을 때보다 복작복작한 게 더 낫다. 하지만 때때로 나는 온전히 내가 아닌 것 같았다. 나를 챙겨주는 사람들과 함께 있음에도 나는 거기에 없는 것 같은 느낌이 자주 있었다. 영혼이 자꾸 몸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 같은 경험을 했다. 전지적 작가 시점처럼 내가 나를 바라보는 일이 잦아졌다. 나는 꽤나 멍하구나, 저기 지나가는 젊은 부부가 부러운가 보네, 옆자리에 앉은 남의 집 아기가 너무 귀여워서 나는 슬픈가 보네, 내 건 사고 싶은 것도 없고 갖고 싶은 것도 없네, 이런 식으로 내 감정을 남의 감정처럼 인식했다.




동생이 계속 생일 선물로 뭐 갖고 싶냐고 재촉했다. 새 집에 필요한 거 없냐고 이것저것 여러 개를 물어봤지만 그럴 때마다 외국에 방치된 신혼 가구나 가전들이 떠올랐다.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우선 급한 대로 12만 원짜리 작은 식탁을 사고 50만 원짜리 소파를 샀다. 결혼 전 혼자 자취할 때 썼던 가구들보다도 더 저렴한 걸로 일단 채워 넣었다. 신혼 가구를 살 때는 신혼이라는 이유로 큰맘 먹고 좋은 거, 예쁜 거를 골랐는데 지금은 그럴 이유가 없어졌다. 푹신한 소파를 좋아하는데 아무래도 50만 원짜리라 그런지 전혀 푹신하지도 편하지도 않다. 아무리 그래도 소파가 일회용품도 아닌데 너무 싸구려를 샀나, 후회되는 마음에 괜히 거실에 떡하니 자리 차지하고 있는 소파가 더 꼴도 보기 싫어진다. 이 집도 같이 싫어진다. 내가 처한 현실은 더더욱 못나 보인다. 분노와 억울함이 한데 엉켜 불쑥불쑥 치밀어 올라오는데 이 감정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원래 집 꾸미기를 참 좋아하는데, 지금은 여기가 내 보금자리라는 마음이 잘 안 든다. 어렸을 때 들었던 동요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하루빨리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지만, 신경안정제를 먹어도 별 안정감이 들지 않는 걸 보니 집도 절도 없어서 그런가 보다. 부모님 집을 떠난 지 오래라 다시 돌아가도 내 집이라는 생각은 잘 안 든다. 본가에 내 방은 아직 그대로 있는데도 내 추억은 이제 다른 집에 더 많다. 솔직한 심정은 퇴근하면 남편과 함께 강아지를 산책시키던 그 시절의 한국 신혼집이 유일한 내 집 같다. 아직도 거기가 내 동네 같다. 그래서 나는 집을 영영 잃어버린 기분이다.




오늘부터 1000일 결사 새벽 정진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108배 정진을 몇 번 해보니 밖으로 흩어지는 내 마음의 괴로움을 온전히 관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아빠도 내게 계속 108배를 이어나가라고 하던 참이었다. 아빠가 추천해 준 절방석이 도착했다. 후기에는 다들 1주일씩 걸렸다던 배송이 단 하루 만에 왔다. 부처님도 나를 살려주려는 걸까. 집도 절도 없다는 말을 취소하고 싶다. 내 마음속에 작은 암자 하나 짓고 열심히 기도해야지. 내 고통도 구름처럼 자연히 사라지면 좋겠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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