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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연주 Jan 13. 2024

바람이 훑고 지나간 자리

내 남편이 혹시 바람난 건 아닐까 쓸데없는 상상



지난밤 세수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화장도 못 지웠는데 저녁약을 챙겨 먹었을 리가. 한 주간의 피로가 쌓였던 탓인지 긴장이 풀려서 그대로 잠들었다. 하지만 약을 깜빡하고 건너뛰어서인지 수면의 질은 매우 나빴다. 또 꿈을 꿨다. 어김없이 남편이 그 여자와 바람을 폈다. 아마 무의식에 깊이 각인된 남편을 향한 내 원초적 감정은 배신감이리라. 혹은 정말 바람이 났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자꾸 이런 꿈을 꾸는지도 모르지.


이미 바람이 난 상태에서 시어머니 심부름을 핑계 삼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이혼을 꺼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일을 이렇게 만들어놓고도 보통 사람들처럼 자아성찰, 반성, 후회 등을 할 줄 몰라 홀라당 새 여자를 찾았을 수도 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남편에 대해 아는 게 없다. 평소에도 사실, 팩트만 고집하다가 자가당착에 빠진 남편이 실은 나에게 가장 진실되지 않은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가끔 남편의 세계에는 0과 1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진법으로만 모든 걸 구분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흑백논리에 자주 빠지는 남편에게 이 세상엔 아름다운 색도 많다고 팔레트를 보여주고 싶었다. 다양함과 유연함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던 내 어리석음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렸을 수도 있다. 남편 논리대로라면 내가 틀렸다.




저녁약을 거른 날마다 꾸는 꿈은 항상 비슷한 내용이다. 남편이 현지인과 바람나는 내용. 남편은 여자를 밝히거나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센스를 갖추지 않은 남자였다. 딱히 여자 문제가 있을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남편을 봤던 정신과 의사나 우리 부부상담 선생님도 남편이 겉으로는 굉장히 믿음직스럽고 뒤로 딴짓을 할 성향의 남자는 아니라고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더 배신감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같은 팀도 아닌 회사 여직원이랑 메시지를 주고받은 것만으로도 충격이었다.


남편이 평소에 연락하고 지내던 사람들은 빤했다. 두어 개의 모임을 제외하곤 일상 사진을 올릴 채팅방도 없었다. 그래서 남편이 요리한 동파육 사진을 누군가에게 보냈을 때도 당연히 그 친구들에게 보냈을 거라 생각했다. 일부러 보려고 하지 않아도 옆자리에 앉았으니 저녁 내내 은근슬쩍 다 보였다. 처음 보는 여자 이름이었다. 외국인 이름이었다. 그 나라 현지 여자구나. 심장이 철렁했다. 우리 결혼식 열흘 전이었다. 걔는 누구냐고 대놓고 물어봤다.


남편은 내게 바로 휴대폰을 건네줬고 나는 메신저를 확인했다. 직장 동료였다. 그 여직원은 한국말이 유창했고, 업무 이야기가 거의 다였다. 둘은 한국어로 대화를 나눴다. 여자는 한국에 있다는 듯 먼저 강남 어디의 사진을 보냈다. 남편은 여긴 웬일이냐고 답장하며 본인이 내게 만들어준 동파육 사진을 보냈다. 그 여자는 우와 맛있겠다, 직접 요리한 거예요?라고 되물었다. 그게 다였다.




특별한 내용은 아니었다. 동파육 사진 보내기 전으로 올려보니 따로 일상 이야기를 한 적도 없어 보였다. 나도 회사에서 친한 남자 동료와 밥을 같이 먹을 때가 있고, 카카오톡으로 생일이나 명절에 안부 인사를 주고받을 때도 있으니 직장인의 시각에서만 보면 전혀 문제 될 내용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 이상했다. 촉이라는 단어 말고는 이 기분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이 남자는 평소에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이 사람은 옛날에 나랑 썸탈 때도 이런 짓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심증만 있으니 더 이상 뭘 어쩔 수 없었다. 남편은 길길이 화내면서 날뛰었다.


“너 이래 가지고 결혼하면 의부증 생기는 거 아니야? 나에 대한 믿음이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면 도대체 나랑 결혼은 왜 해? 여기서 접자 아주 그냥!“


내게 모진 말을 계속 쏟아냈다. 나는 미안하다고 싹싹 빌었다. 근데 왜 자꾸 요즘도 꿈에 그 여직원이 나올까. 나의 괜한 트집이 트라우마로 자리 잡은 걸 수도 있고, 정말 우주가 보내는 촉일 수도 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전국이 ‘본업과 주유’ 사건으로 난리가 났다. 워낙 필력이 좋은 분의 글이라서 나도 단숨에 읽었다. 우리가 14년을 함께 한 것도 아닌데 내 마음이 다시 한번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미 블라인드에 많은 사람들이 하루종일 그들에 대한 카더라를 읊고 있었다. 결혼 예정이었던 안주은은 이미 혼인신고를 했다고, 예비신랑이 너무 충격받아서 무너졌고 이혼소송 중이라고. 와중에 이재원은 뻔뻔하게 출근을 했다고. 어쩌고 저쩌고.


익명의 사람들은 글쓴이를 쉽게 비웃기도 했다. 애초에 9급 공무원 준비를 10년이나 한 돌대가리 남자친구를 성심성의껏 뒷바라지한 그 여자가 한심하다고. 너무 가소로워서 불쌍하지도 않다고. 엄마집에 데릴사위처럼 얹혀살게 해 준 것까지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웃기지도 않다. 다들 자기가 경험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함부로 말한다. 남의 인생을 너무 쉽게 재단하려 든다. 그들의 댓글만 보면 그녀나 나나 ‘남미새’ 일뿐이다. 다들 참 너무 잘났다.




바람은 어쩌다가 바람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걸까. 왜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행위에 해, 달, 구름, 별처럼 예쁜 단어를 갖다 붙였을까. 아마 그 바람이 지나가며 삶의 모든 걸 흐트러뜨려서 그런 건 아닐지. 내 남편이 정말 바람을 피우고 있든 폈든 펴봤든 중요하지 않다. 남편의 존재 자체가 평온했던 내 삶을 들쑤셨다. 그게 남편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팩트이자 진실이다. 내 남편이 바람이다. 바람. 바. 람. 발,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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