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세와 새별과 큰노꼬메

하여 나는 제주

by 글 짓는 은용이

‘우린 한라산에 다녀왔어. 백록담도 봤는데 오름쯤이야 뭐, 일도 아니지’ 하는 마음. 짝과 벗과 내겐 없는 느낌이다. ‘제주 좋아한다면 백록담 꼭 봐야지’ 하는 생각도 애초 없었고. 한라산 떠올리면 늘 두렵고 좋아 몸 낮추고 마음 비우려 더 고물고물한다.

윗세. 점심나절에 올라갔다가 느지막이 내려오며 노루 만나곤 한 오름. 한라산 두렵되 그리울 때 찾아갔다. 영실로부터 사오십 분쯤 걸어 병풍바위를 옆에 두고 계단을 오를 때 허벅지와 장딴지로 찾아오는 건 두서너 해 사이 더 가라앉은 삶 무게. 조금씩 뻐근히 눌리는 무거움. 좋았다. 뭐든 검질기게, 어디든 진득이 걸어야 했으니까.


중력 거스르느라 거북스런 허벅지와 장딴지가 ‘이제 좀 쉬자!’ 할 즈음 탁 트인 선작지왓에 서면 나 또한 그대로 굳어 작은 돌 되고 싶었다. 백록담 남쪽 벽 바라보며. 선작지왓 옆 윗세족은오름 꼭대기에 올랐을 때에도.

제주 오름을 속속들이 느낀 박선정이 <오름오름>에 쓴 걸 보니 윗세족은오름은 바닷물 표면으로부터 1698.9미터. 윗세누운오름과 윗세붉은오름은 더 높아 1711미터와 1740미터. 높다 높아. 뙤약볕 더 뜨겁고 바람 더 시원한 까닭이겠지. 산 좋아하는 사람 마음을 나도 아주 조금 얻은 듯싶다. 산에 꾸준히 가고픈 생각은 아직 없고.


“들판에 저 산만 볼록해.”

“그러게 눈에 띄게 솟았네. 저기 표지판 있다. 새별··· 오름.”

새별. 또는 샛별. 그러니까 금성 딴 이름. 서귀포 쪽에서 사랑하는 협재나 곽지 바닷가로 달려갈 때 눈에 띈 오름. 꼭대기는 바닷물 표면으로부터 519.3미터. 들판에 홀로 선 산. 저녁 서쪽 하늘이나 새벽 동쪽 하늘에 밝은 샛별처럼.

“이 풀 뭐지? 억샌가?”

바람이 억새에 자기 모습 드러내는 오름. 오르는 길 가팔라 이리저리 눕는 바람 모습만 보였다. 억새 밑 땅바닥하고.

“와··· 좋다. 여기 좋아.”

중턱에 선 채 올라온 곳 뒤돌아볼 때에야 보였다. 너른 들판과 저 멀리 파란 바다. 더욱 높이 올라설 때에야 더 많이 보였고. 한라산과 여러 오름과 비양도까지. ‘상하이에서 부산으로 날아가며 내려다본 곳이 아마도 이 둘레였을 텐데.’


새별오름 속 벗은 늘 저만치 앞서다가 아득한 등성이에 몸을 걸쳤다. 한숨에. 짝과 나도 단숨에 오르긴 했다지만 어디 벗에게 댈까. 중턱에 선 채 허리 짚고 숨 고른 걸 부러 잊어야 했다.

짝과 내가 꼭대기에 닿았을 때 벗은 이미 귀에 꽂은 두세 노래 듣고 난 뒤. 가만히 앉아 구름과 한라산 바라보는 벗이, 애월 쪽 바다로 고개 돌리다가 짝과 나를 바라보는 그가 아름다웠다.

<제주 역사 기행>을 쓴 이영권은 새별오름에 올라 “이곳은 결코 평온한 장소가 아니”라고 짚었다. 1374년 고려 군사 2만 5,605명과 제주 목호 기병 3,000명이 맞선 싸움터. 제주에서 말 기르며 살던 목호가 서귀포 서홍과 예례와 범섬으로 떠밀리기 전에 크게 부딪혀 많은 피 흘린 곳. 이영권은 “새별오름이 전쟁을 기억하며 반성하는 공간으로, 평화를 기원하는 공간으로 그렇게 남았으면 좋겠다”고 썼다. ‘싸움질로 사람 죽여 쫓고 빼앗는 것보다 나누며 함께 웃는 게 더 이롭고 더욱 아름다운 삶인 걸 알 때도 됐지. 더 늦기 전에.’


제주에 눈이 많이 쌓였다. 온통 하얗게. 2018년 일월 27일 토요일. 겨울 제주에 처음 내려앉은 짝과 벗과 나는 나흘 동안 눈꽃바람 마음껏 마셨다.

윗세오름엔 갈 수 없었다. 눈이 많이 쌓였기에. 영실 문턱조차 넘을 수 없게 길 막혔으니까. 하여 한라산 1100고지와 산굼부리와 절물휴양림. 발목 넘겨 푹푹 빠지는 눈길에 웃었다.

특히 큰노꼬메오름. 바닷물 표면으로부터 833.8미터. 제주 오름 가운데 높은 축에 드는 산. 그해 일월 29일 월요일 오후 두 시 반께. 눈이 쏟아지진 않았지만 올 듯도 했다. 해 반짝였되 구름 흐르는 게 예사롭지 않았으니까. 조금 흩날리기도 했고. ‘올라가도 될까. 괜찮을지 모르겠다.’

오른쪽 능선을 타고 오르는 길. 해가 반짝. 좋았다. 아니, 숲에 드니 바람 휘몰아쳤다. 바람이 불러일으킨 눈발 세찼고. ‘돌아서야 할까. 괜찮을지 모르겠다.’


말없이 앞서 걷는 짝과 벗. 휴대폰 수신 표시 막대가 다 사라지지는 않는지 눈치껏 살핀 나. 말없기로는 매한가지였고.

숲 뒤로 하고 저 멀리 왼쪽 꼭대기가 보이는 등성이로 올라서니 하늘이 까맸다. 잿빛 구름. 오른쪽으론 한라산이 보일 성싶은데 더욱 까맸다. 세 시 이십삼 분. 올라선 자리에서 뒤돌아보니 아득한 한림 앞바다에만 구름 뚫고 햇살 내렸다. 동그랗게. 고개 돌려 앞을 보니 서귀포 쪽으로는 좀 더 넓게 하늘이 트였고. ‘사람 잡을 구름은 아닌 듯싶네. 눈바람도 그렇고. 좀 더 가 보자.’


“여기가 끝이네! 와··· 아무것도 안 보여. 여기, 좋다.”

짝과 벗과 나는 안갯속에 폭 들었다. 눈발 세찼고. 한두 치 앞은 보였되 네댓 치는 먹힌 안개인 듯 구름인 듯. 큰노꼬메 꼭대기. 세 시 삼십이 분. 즐거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짝과 벗과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는 알았으니까. 휴대폰 수신 표시 막대도 활짝 살아 있었고.


뽀득뽀득. 앞서 눈 밟는 벗 걸음이 예뻤다. 2018년 일월 29일 오후 네 시 삼십칠 분. 큰노꼬메 아래 목장 길. 찰칵찰칵. 뒤서 사진 찍는 짝 마음이 예뻤다.

벗이 짰다. 겨울 오름에 가 보자고. 눈에 막혀 윗세에 가지 못하니 큰노꼬메를 찾아냈다. 오름은 여기저기 숨어 옹송그린 채 애써 찾아온 사람 폭 품는 재주 있는 듯. 여기저기 끝없이 열려 짝과 벗과 나를 내내 품을 성싶다. 헉헉 숨 몰아 하늘로 툭 트라며.

새별오름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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