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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anc Mar 15. 2022

시험관 시술과 함께 내려놓은 것

남편과의 갈등, 그리고 커리어

지난 글에 썼지만, 우리 부부가 '암묵적 딩크'로 살다가 시험관 시술을 결정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가장 어려웠던 건 내 마음이었다. 남편을 향한 서운함이 누그러지는 데만 몇 달이 걸렸다.


결혼 후 4년 간 내가 자녀 계획에 대해 상의하려고 할 때마다 남편은 회피하거나 딴 소리를 했다. 산부인과에 가서 배란일을 잡아도 시큰둥, 그렇게 '인위적으로 노력하는 게 거부감이 든다'라며 거부했고, 난임 검사조차 하지 않았다. 때문에 나는 아이를 가질 생각은 완전히 접은 상태였다. 나도 아이를 꼭 가져야만 한다는 주의는 아니어서 내 마음은 서서히 '우리 부부는 암묵적 딩크'라고 굳혀졌다. 어느 순간부터 길가의 아이를 보아도 귀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심 '아... 귀찮겠다'라는 마음까지 생겼고, 아이를 기르는 친구들이 정말 위대해 보이는 지경까지 이르게 됐던 거다.


그리고 내 커리어에 대해 뒤늦게 깊은 고민을 하다가 노무사 준비를 하게 됐고, 퇴사 후 공부를 시작한 지 3개월 정도 됐던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TV를 보다가 남편이 불쑥 말했다.


 "친구가 시험관 했댔지?"

 

내가 응, 하고 갑자기 그건 왜 묻냐고 했더니 "우리도 시험관 할까?" 하는 거였다. 자연 임신 시도도 배란일에 맞춰서 본격적(?)으로 해본 적이 없는데 웬 뜬금포냐고 했더니 남편이 지난 몇 달간 통증 때문에 비뇨기과에 다니다가 우연히 이런저런 검사를 하게 됐는데, 자연 임신이 불가하다는 소견을 받았다는 거였다.


아니... 잠깐만


나는 머릿속이 혼란스럽기 시작했다. 일단 자연 임신이 불가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충격은 당연히 이해했다.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그런데 내가 분노한 지점은 혼자 결정하고, 통보하는 그 태도였다. 나에게 전혀 말도 없이 혼자 정자 채취까지 마치고 병원에 동결까지 해놓고는 이제 시험관 시술을 시작하면 되지 않겠냐는 거였다. 내가 공부를 시작하기 전, 마지막으로 "우리 그냥 애 없이 살아도 괜찮겠지?"라고 물어봤을 때 아이가 생기면 부부 각자의 자유가 없어지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걸 분명히 들었는데, 남편은 자기는 그런 적이 없고 아이를 가지기 싫다고 말한 적도 없다고 우겨댔다.  (OMG,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난다...)



왜 나와 상의도 없이 그 모든 걸 혼자 결정하고, 진행하고 통보하는지, 그리고 왜 하필 회사를 그만두고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는 지금 이러는 건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편은 자신은 40대가 돼도 언제든지 아이는 가질 수 있을 거라는 자만이 있었는데, 자연 임신이 불가하다고 하니 마음이 급해진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회사에 다니는 게 아니니 시험관 시술을 병행하는 게 몸에도 덜 무리가 가지 않겠냐는 거였다.



나는 한 대, 두 대, 세 대... 연달아 펀치를 맞고 쓰러져가는 것 같은데, 남편은 자기가 때리고 있는 줄도 몰랐다.  남편과 내 생각은 매우 엇갈리고 있었다. 아이는 내 인생 계획에서 빠져버린 지 이미 오래였고, 중요한 목표를 위해 매진하는 중이었는데 남편은 내가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나는 아이를 가지지 않을 거니까 더 안정적인 커리어를 위해 딱 1년만 투자해보고, 안 되면 접을 생각으로 전력투구하는 중이었지만 남편은 내가 너무 자주 목표를 변경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남편 입장에서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본래 일하던 업계와는 전혀 다른 업계로 이직해 7년 간 나쁘지 않은 보수를 받고 일했지만, 내면은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다. 결국 내가 좋아하고, 성과를 낼 수 있는 이전 업계로 복귀했었다. 하지만 7년이 지나도 그 업계는... 그대로였다.  대부분 중소기업이고 정년이 될 때까지 일하는 분들이 거의 없었다. 100세 시대에, 중소기업이 대부분인 이 바닥에서 내가 언제까지 직장을 다닐 수 있을지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때 자격증 시험이 눈에 들어왔다. 당장 자녀가 있는 것도 아닌데, 1년 정도 공부해서 전문직이 된다면 길게 봤을 때 직장인인 남편과 나 둘 모두에게 좋은 길이라 믿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열정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나는 회사 가기 전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공부를 하고, 퇴근 후 한 두 시간이라도 공부하며 다섯 달 정도를 보냈다. 그렇게 전문자격사 시험 1차에 합격한 뒤, 모아둔 돈으로 딱 1년만 공부해보겠다는 결심을 하고 퇴사한 상태였다. 그리고 고3 수험생만큼이나 빡빡한 공부 스케줄을 성실히 지키고 있었다.


이제 와서 아이가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까지 그래, 이해했다. 그런데 공부와 병행하는 건 불가능이라는 것도 남편은 동의하지 않았다. 회사를 다니면서 하는 것보다는 쉬울 거라고, 어차피 집에서 몸이 편하지 않냐는 거였다. 전문자격사 시험도 요새는 '고시'로 취급한다. 그런데, 고시 공부를 하면서 시험관을?


그때부터 갈등이 시작됐고, 우리는 계속 싸웠다. 시험관 시술 과정을 알게 될수록 나는 두려워졌고 그 모든 과정을 전부 나 홀로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억울해서 마인드 컨트롤을 하기가 어려웠다. 이제라도 시도해볼 수 있는 게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면서도 남편이 괘씸했고, 공부와 병행해보자는 결심이 섰다가도 결국 두 마리 토끼는 잡지 못 할 거라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나는 두 달여간 남편에게 내 심정이 어떤지, 왜 이해가 안 가고 서운한 건지 반복해서 말해야 했다. 평소에 밝고 긍정적이지만 깊은 대화가 어렵고, 자기의 진짜 깊은 마음과 상대의 깊은 속을 들여다보며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에 서투른 남편을 설득하는 데 온 에너지를 다 써버렸다. 마침내 2022년 2차 시험이 끝나는 대로 시도해보자는 결론이 났었다. 그게 작년 11월의 일이다.


하지만... 내 마음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남편이 했던 말 중에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 공부가 우리의 일보다 중요해?" 


그 말이, 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어떤 쪽을 포기하는 게 나중에 덜 후회될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시험을 볼 기회와 한 해라도 빨리 아이를 가질 기회 중에서.


결국 나와 남편은 그다음 달, 난임 검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병행하려고 노력했었다. 심지어 과배란 주사를 매일 맞으면서도 매일 9시간씩은 책상에 앉아 있었고, 난자 채취 직전 날까지 공부를 했다. 신림동 통학을 하지 않고 집에서 인터넷 강의만 들었지만 공부하는 기간 동안 당일 진도를 놓치거나 미뤄본 적이 없었고 남편과 아무리 싸웠어도 카페에 공부할 거리를 싸들고 나가서라도 그날 해야 할 공부는 반드시 마쳤었다.


하지만 난자 채취일 이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역시 내 우려가 맞았던 거다. 고시 공부와는 병행할 수 없는 길임을 인정해야 했다. 난자 채취를 하면 난소를 여러 번 찌르기 때문에 육안으로 보기에도 아랫배가 확연히 부풀어 오른다. 소화도 되지 않고 숨을 쉬기도 힘든데, 한 자리에 앉아 집중해서 판례를 외우고 모의고사를 본다는 건 내가 아무리 슈퍼우먼이라도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육아를 하면서 시험에 붙는 분들도 물론 계신다. 정말 존경해 마지않는다. 그런데, 난자 채취 후유증은 '육퇴'같은 퇴근도 없었다. 1~2주 동안은 컨디션이 말도 안 되게 저조한데, 시험 공부는 그 정도 기간이면 한 과목의 강의 사이클이 끝나버린다.  


난자 채취 후유증이 조금 나아질 만하니 채취된 난포 15개 중 12개가 공난포라는 날벼락이 떨어졌고, 나는 더 이상 멘탈을 부여잡기가 힘들었다. 그중 하나라도 이식하지 못할까 봐 기다리는 며칠이 지옥 같았다. 결국 1개의 배아만 살아남았고, 이식한 후 신의 영역이라는 '착상'이 이루어지는 열흘도 하루하루가 피 말리는 시간이었다. 어지러운 마음으로 강의나 교재를 깔짝이며 봤지만, 더 이상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시험관 1차 시도는 피검사 수치 0.9xx 완전한 실패로 끝이 났다. 동결된 난자도 없기 때문에, 2차를 시작하려면 두 달 정도 쉬면서 몸을 최상의 컨디션으로 만들어놔야 했다.



한 마리 토끼는 놓아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지 이제 두 달 째다.

아침 7시에 일어나 자정이 넘어야 공부 일과가 끝나던 게 불과 두 달 전이었다. 시험관 1차 때만 해도 공부가 우선이어서 공복에 커피만 마시고 점심도 대충 때웠고, 일주일 내내 강의 듣고 복습하며 보내다가 주말 저녁에는 남편과 술도 마셨다. 하지만 두 달만에 내 일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는 공부하듯이 난자질 개선을 위해 매진한다.



아침 7시에 주사를 맞은 뒤 한큐 주스를 갈아먹고, 스트레칭을 한다. 그리고 등산을 한 뒤 햇빛을 보며 걷는다. 일주일에 두 번은 한의원에 가서 쑥뜸과 자궁에 좋다는 침을 맞고, 매일매일 마음이 편안해지는 시를 읽거나 독서를 하고, 글을 쓰면서 하루를 보낸다. 매끼 고단백 음식을 챙겨먹고 자기 전에는 족욕이나 반신욕을 하고 이르면 10시 늦어도 12시 전에는 잠든다. 술과 카페인은 완전히 끊었다. 남편도 친구들과 약속을 되도록 잡지 않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는다.  



시험관 시술을 결정하면서 공부를 포기했지만, 얻은 것이 있다면 남편과의 소통이다.

우리는 전보다 더 많이 얘기하고 서로 더 이해하려고 하고 배려하려고 노력한다.

우리가 이 터널 끝에서 언제 나가게 될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 두 손을 잡고 함께 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밝지만 따로 흩어져 가는 길보다는 어두워도 손잡고 가는 길이

부부에게는 더 소중한 것 아닐까? 시험관 시술 전에 꼭 해야 하는 일이 딱 하나 있다면,

다른 무엇보다 남편과 아내가 마음으로 하나 되는 것일 테다.



저게 저절로 붉게 되었을 리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오늘 읽은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라는 시.

대추 한 알에도 만물이 관여하는데, 난임 부부들은 우주보다 소중한 아가들을 위해 오늘도 얼마나 많은 것들을 넣고 있을까. 주사 몇 개, 약 몇 알은 아무것도 아니다. 눈물 몇 방울, 두근대는 심장 몇 개, 지새우는 밤 몇 날, 그리고 내려놓은 꿈들 몇 가지...


세상의 모든 아기들이 귀하지만 난임부부들의 아기들은 그 안에 더 많은 태풍과 천둥, 벼락이 들어 있고 더 많은 날과 밤이 들어서, 더 귀하고 귀할 거다. 공부든, 커리어든 나처럼 무언가를 포기하고 오늘도 똥글똥글 대추 같은 난포 키우고 계신 난임 엄마들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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