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서 비워진 마음
지난주 수요일, 퇴근해서 도착한 집 앞에 택배 상자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옷에 차는 벨트인 거 같았는데, 다른 하나는 겉만 봐서는 알 수 없었다. 박스 크기가 크고 무거웠다. 이만한 걸 시킨 적이 없어서 궁금해하며 뜯었다가 이내 놀랐다. 보내지 말라고 몇 번이나 사양한 게 기어이 왔구나. 이 일을 어쩌지.
대구에 본가가 있는 회사 후배가 보낸 거였다. 엄밀히 말하면 그녀의 어머니가 보내주시고 싶다고 추석 전부터 주소 알려달라 하셨단다. 내 코가 석자라 잘 챙겨주지도 못하는데, 서울에서 혼자 일 다니는 자식의 가까운 선배라는 이유만으로 든든하고 고마우셨던 것 같다. 그 마음에 내가 더 감사해서 아무것도 안 주셔도 잘 지낼 테니 괜찮다고 말씀드리라고 열 번도 더 말했다.
내 입으로 주소 밝힐 리 없다 생각했는지 전산 시스템에서 조회했더라. 그러는 중에 택배가 마감되어 명절 지나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길래 최선을 다해 말렸다. 진짜 안 보내시면 안 되냐고, 받을 자격 없으니 안 주시면 좋겠다고 했지만, 나의 이 간곡한 사양이 소용없었나 보다.
얼마나 꼼꼼하게 싸셨는지 포장부터 감동이었다. 황송한 마음으로 뽁뽁이를 벗기자 그 아래서 연둣빛 작은 조명들이 한 한 알 한 알 반짝이고 있었다. 이렇게나 탐스럽고 탱탱한 샤인 머스캣을 본 적이 있던가. 잠시 동안 눈의 호강에 빠져있다 나와 처음 든 생각은 단순했다. ‘이 귀한 걸 어떻게 먹지‘ 였으나...
냉장고로 옮겨놓고 돌아서자마자 눈에 밟히는 거다. 그래, 귀한 건 맞는데 잘 소비해 주어야 감사가 커지는 법, 한 송이만 먹어보자. 씻어서 반반 나누어 하나는 아들 주고 다른 하나는 내 책상으로 가져왔다. 포도류를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이날 진짜 숨도 안 쉬고 입에 계속 넣은 것 같다. 달달하고 단단한 과육이 툭툭 터지는 것도 환상이었지만, 돈 주고도 못 사 먹을 맛인 게 분명해, 왜냐하면 여긴 마음이 들어있거든!
이 나이 먹도록 생일이나 기념일 아닌 날에 선물 받은 기억이 거의 없다. 성격은 타고난다는데, 나란 사람의 성격은 선물이든 단순 물건이든 공짜로 받는 거에 많이 민망해하는 편이다. 부담스러워서인 것 같다. 선물을 선물로만 인식하고 감사의 표현만 진심 다해서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 마음은 아니었던 거다. 호의를 받았으니 언젠간 갚아야 한다는 부채감이 생긴달까. 지독한 귀차니스트 ISFP에게 이런 상황은 결코 달갑지가 않다. 마음으로야 넘치게 감사하지만 말이다.
오늘 글감이 ‘냉장고 앞에서’이다. 새벽에 확인하자마자 피식 웃었다. 운영자님이 내가 과일 선물 받고 냉장고에 보물 숨기듯 넣어놓은 걸 알기라도 한 건가 싶어서다. 안 그래도 사진 찍으면서 인스타에 올릴까 했는데, 미루는 사이에 이렇게 밝히게 될 줄이야. 텔레파시 내지 운명인 걸로 할까.
귀한 선물이기 전에 음식이다. 빨리 먹지 않으면 시들고 상할 텐데 차마 와구와구 소비할 수 없었다. 아직 네 송이 남은 거 같다. 목요일에 하루 월차 냈으니 내일 저녁에 여유 있고 우아하게 즐겨야겠다. 이 글 마치는 대로 샤인 머스캣 맛있게 먹는 법 좀 검색 해보고 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