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디렉터 김유경이 바라보는 세상
막걸리, 와인, 맥주, 김치, 간장, 된장, 수제비, 치즈, 빵, 요거트… 이 음식들이 가진 공통된 특징은 무엇일까요? 첫번째는 ‘맛있다’라는 것과 두번째는 ‘숙성과 발효’를 거친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숙성과 발효. 음식의 맛을 좋게 만들기도 하고, 맛의 깊이를 끌어올리기도 하고, 맛의 형태를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인내’ 를 통해 재료 자체의 부가가치를 높여주는 자연의 선물. 인간으로 태어나 누릴 수 있는 ‘마법’이 아닐까요? 인류의 식생활의 가치를 높여주는 숙성과 발효의 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신은 단지 물을 만들었지만, 인간은 와인을 만들었다.”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가 ‘정관시집 (Les Contemplations) 에 쓴 말로 발효를 이야기할 때 와인을 빼먹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즐겨먹는 와인 한 잔. 이 와인의 탄생에 대한 여러가지 가설이 있는데요. 그 중 가장 유력한 가설 중 하나는 술 취한 원숭이 가설입니다. 물웅덩이에 우연히 떨어진 포도들이 자연적으로 발효되어 포도주가 되었는데, 지나가던 원숭이들이 이것을 마시고 취해 비틀거렸다고 합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인간들이 직접 맛을 보니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달콤함과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와인의 맛에 매료되 와인을 적극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포도는 당은 과실에, 효모는 껍질에 가지고 있어서 포도가 으깨지면 포도 껍질에 묻어있는 효모들이 과실에 있는 당을 먹고 발효가 되기 시작하며 알코올을 만들기 시작하는 원리입니다. 이러한 원리로 포도주와 식초는 기원전 1만년경에 기원되었다고 추정되고, 맥주는 발아시킨 보리 반죽을 사용해 기원전 5,000~ 6,000년경 부터, 치즈는 송아지의 위에서 뽑아낸 레넷 (Rennet) 을 우유에 넣어 기원전 5,000년경부터, 빵은 이집트 나일강 유역에서 대기 중에 존재하는 박테리아와 효모가 자연 발효해 기원전 4,000년 경부터 출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먹고 있는 와인, 맥주, 치즈, 빵은 모두 효모를 바탕으로 인류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오고 있죠.
서양의 기록뿐만 아니라 한국의 고서에서도 발효의 기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에는 고구려 대무신왕때 한나라 태수가 요동을 침입해 왔을 때 성안의 물로 술을 빚어 한나라의 군사에게 보냈는데, 이후 적이 물러갔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술은 곡물을 발효해 만든 '곡아주 (曲阿酒)' 였으며, 맛이 좋아 지주 (旨酒) 라고 불렸다고 전해오고 있고요. 우리가 즐겨먹는 막걸리 (탁주), 약주, 증류식 소주는 모두 쌀을 원재료로, 누룩을 효모로 넣어 발효해 만들어집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쌀 소비량인데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있는 안동소주를 만들 때 쌀 한 가마니 (80kg)로 빚을 수 있는 술은 막걸리(탁주)가 487L, 약주는 180L, 증류주는 57L 를 제조할 수 있습니다. 밥 한공기가 200g이라고 봤을 때, 쌀 한가마니를 소비하려면 400 공기나 먹어야하지만, 100ml 안동소주는 140병이면 충분하다는것이죠. 그 말인 즉슨 쌀을 밥으로만 먹을 때보다 발효와 증류를 거쳤을 때는 술이 되면 쌀의 부가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포도 한 송이보다 와인 한 병의 가격이 더 높고, 배추 한 포기보다 발효를 거친 김치 한 포기의 가격이 더 높은 것과 동일한 개념입니다.
발효 (Fermentation) 의 어원은 끓는다는 뜻의 라틴어 'Fever' 에서 유래되었고, 효모 (Yeast) 역시 거품을 만들어 끓는다는 뜻의 그리스어 'Gyst'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숙성 (Aging)은 나이가 들어간다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언뜻 보면 같은 의미인 것 같지만, 조금 더 살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발효는 효모의 작용에 의해 끓어 알코올이 생기는 화학적 변화를 말하고, 숙성은 산소를 서서히 내보내며 맛이 차고 무르익어가는 세월의 이미지가 녹아있습니다. 쉽게 말해 발효를 하려면 효모라는 것이 필요하지만, 숙성을 하려면 재료 그 자체의 힘과 시간이 필요한 것이죠.
몇 년전부터 외식업계의 판을 바꾼 개념이 있습니다. 바로 ‘숙성’ 입니다. 드라이에이징 한우, 웻에이징 돼지고기, 숙성회, 탕종식빵 등 재료 본연의 깊은 맛을 끌어내 맛의 판도를 바꿔낸 숙성 요리들입니다. 사실 숙성은 전혀 낮선 개념이 아닙니다. 정육점에 있는 진공 포장된 고기들, 고급 일식집에서 맛볼 수 있는 입에서 사르르 녹는 참치회, 꿀을 뿌려먹는 고르존졸라 치즈피자… 같은 고기고, 같은 생선이고, 같은 치즈지만 뭔가 더 부드럽고, 혀에 찰싹 붙으며, 깊은 맛을 냅니다. 과거에는 ‘갓’ 도축한 한우, 바닷가에서 ‘갓’ 잡아올린 활어회 등이 신선도가 생명이고, 뭐든 신선해야 맛있고, 좋은 음식이다라는 편견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고기는 도살이 되면 사후 경직이 차츰 풀리고, 고기 자체에 있는 단백질분해효소로 인해 큰 분자가 작은 분자로 쪼개지면서 연도가 개선되며 부드러워집니다. 생선은 저온에서 서서히 단백질이 분해되면서 감칠맛을 내는 이노신산 (Inosinic acid)의 함유량이 높아지며 고유의 감칠맛과 단맛을 내게 됩니다. 분명 같은 고기지만 시간을 갖고 인내하면 숨어있던 또 다른 가치가 나타나게 됩니다.
요즘 즐겨먹는 식빵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생 (生) 식빵인데요, 밀가루와 끓인 물을 섞어 반죽하는 탕종법으로 반죽해 더 쫄깃 쫄깃하고, 국내 1위 베이커리 프랜차이즈 브랜드 파리바게트에서는 프랑스나 미국의 효모가 아닌 우리나라 토종 효모를 활용해 탕종 생식빵도 출시했습니다. 토종 효모에 토종 유산균 4종을 혼합 발효한 상미종 식빵은 마치 갓 지은 밥처럼 포근 포근하고,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냅니다. 숙성과 발효의 미를 동시에 깨닫을 수 있는 빵이랄까요? 시간이 갈수록 원숙미가 느껴지는 여성처럼, 버섯향이 콤콤하게 나는 올빈와인 (Old Vintage Wine) 처럼 시간이 주는 숙성과 발효의 매력은 인류의 먹거리를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글 | 푸드디렉터 김유경 (안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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