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수확 (1889)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 작품명 : 수확 (La Moisson)
- 작가 :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 제작시기 : 1889년
- 전시장소 : 에센 폴크방 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는 유독 밀밭 그림을 여럿 남겼다. 계절마다 다른 색을 드러내는 밀밭은 가난한 화가에게 좋은 그림 소재였다. 뿐만 아니라, 땀 흘려 추수하는 농부의 노동은 사실주의 회화가 등장한 이래 쭉 예술인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씨를 뿌려 생명을 만드는 것, 그 생명을 거두는 것, 하지만 거둔 곡식이 인류의 식량이 되고 또 새로운 씨가 되는 '순환'은 고흐가 탐구하는 주제였다.
의욕적인 '아를의 아지트'가 실패로 끝나고 심각한 불안증세와 정신 질환을 앓게 되자, 고흐는 자진하여 생레미의 요양원에 들어간다. 그리고 요양원 창 밖으로 보이는 제한된 풍경을 반복적으로 그리며 본인의 세계관을 넓혀가는데, 창 밖에 보이는 밀밭도 그가 사랑한 소재였다.
요양원 입원 후 첫 두 달 정도는 고흐도 병에서 회복되고 건강하게 그림을 그릴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작품은 생명력의 에너지가 느껴지는 밝고 힘찬 작품을 볼 수 있는데, <수확>이 그 중 하나다. 선명한 황금빛 들판, 눈부신 태양, 낫을 들고 힘차게 추수에 한창인 이름모를 농부. 힘찬 붓선에 과감한 채색으로 밀밭이 파도치는 듯 강렬한 에너지를 담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고흐의 희망찬 시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는 요양원에 감금된 생활에 지쳤고, 우울증과 발작 증세도 심해졌으며, 자신의 그림에 만족하지 못하는 날들이 늘어갔다. 가령, 고흐의 마지막 순간을 암시하는 상징적 작품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 <수확>으로부터 1년 뒤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탄생된다. 1889년 생레미에서 잠시 희망을 꿈꾸며 밀밭의 건강한 땀과 수확을 찬미하던 고흐는 1890년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까마귀가 하늘을 덮은 불길한 밀밭을 그리며 180도 달라진 내면의 인식을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수확>은 귀하다. 고흐의 긍정과 낙관이 담긴, 그의 일생에 길지 않은 찰나의 시기에 맺은 결실이기 때문. 한편으로는 생각해본다. 그 힘찬 생명력의 에너지가 역설적으로 밀의 생명을 거두어가는 순간에서 나온다. 즉, 한 생명이 꺼짐으로써 다음 생명이 시작되는 순환이 기저에 존재한다. 어쩌면 이 찰나의 시기는, 고흐가 건강해질 날을 기대하면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곧 찾아올 자신의 마지막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하는 순간이었을지 모른다.
생명은 돌고 도는 것이니 이왕이면 힘차게 순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황금빛 밀밭의 한껏 강렬한 생명력으로 발현되었나보다.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미술에 문외한인 여행작가가 여행 중 만난 미술 작품을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어느날은 길게, 어느날은 짧게, 어느날은 비평으로, 어느날은 감상으로, 하여튼 미술을 말합니다.
(매주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