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또는 외계인

히에로니무스 보스,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 (1490-1510)

by 유상현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 작품명 :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

- 작가 : 히에로니무스 보스 (Hieronymus Bosch)

- 제작시기 : 1490-1510년

- 전시장소 : 부다페스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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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부다페스트 미술관에서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을 보았다. "이게 왜 마드리드가 아니라 여기에 있지?" 그러고보니 패널의 좌우에 배치되는 에덴편과 지옥편은 보이지 않는다. 레플리카인가? 그렇다. 사정을 알아보니 몇해 전 부다페스트에서 히에로니무스 보스 특별전이 열렸는데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은 작품 보호를 위해 반출이 불가하여서 중앙의 "쾌락의 동산"은 고품질 레플리카로 전시하고, 에덴편과 지옥편은 패브릭에 인쇄해 나란히 전시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기괴한 그림을 계속 볼 수 있도록 레플리카를 부다페스트 미술관에 전시 중인 것이라고 한다.


물론 에덴에서 시작한 타락이 현세에 어떤 죄를 잉태하여 지옥으로 귀결되는지 화가의 메시지를 온전히 들으려면 3부작을 나란히 보아야 하지만, 그래도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쾌락의 동산"이나마 조용한 미술관에서 몰입하여 볼 수 있는 게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흡사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초현실주의 작품처럼 보이는 것이 알고 보니 500년 전 작품이라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컬처쇼크를 느낀다. 그 시절에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하고, 또 그 상상을 정교하게 현실에 구현하였을까. 그리고 그 시대의 사람들은 이런 기괴한 그림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에덴부터 지옥까지의 연결고리는 이 작품에 기독교적 관점이 담겨있음을 뜻한다. 참고로,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곤혹을 치른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1600년대 사람이다. 21세기에 보아도 기괴한 그림을 종교재판이 횡횡하던 1500년대에 기독교적 관점을 담아 이토록 기괴한 그림을 그렸다는 게 낯설기만 하다. 보스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회귀한 현대인인가? 혹은 외계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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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애니메이션에 나올 것 같은 신비로운 구조물과 연못이 그림 상단에 있다. 이것은 원래 왼쪽 패널에 있었을 에덴동산에 묘사된 낙원과 같은 구조다. 그런데 둥그런 구슬 같은 곳의 내부에 성적인 유희를 즐기는 나체의 남녀가 있다. 이 연못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작품의 하단으로 흘러내리는데 갈수록 물빛이 탁해진다. 즉, 에덴이 타락하여 사람들이 쾌락만 쫓으니 갈수록 죄가 더 심하게 오염된다는 의미다.


아래로 내려올수록 나체의 인간들이 무리를 지어 기괴하게 유희를 즐기고 있다. 도처에 과일이 보이는데, '선악과'에서 알 수 있듯 과일은 순간적인 달콤함, 즉 타락을 은유한다. 노골적으로 성적인 은유를 담아 조개 껍질 속에 남녀의 다리만 보이기도 하고, 곧 깨질 것 같은 유리 구슬 속에서 애정을 표현하는 남녀는 이러한 쾌락이 덧없는 허상과 같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동물도 등장하는데, 초자연적인 형상을 하고 있다. 인간보다 큰 새, 물고기, 현실엔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 동물이나 이종혼합 크리처까지 별 것들이 잔뜩 있다. 인간은 때로는 동물들에게 복종하고, 쾌락을 갈구하기도 한다. 몹시 혼란하다. 하나하나 함의를 담은 무수한 피사체가 큰 액자를 꽉 채웠는데, 더 신기한 것은 이 모든 피사체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일정한 균형과 리듬감을 가지고 미학적으로도 절묘하게 어울린다는 것이다. 상상력만 풍부한 게 아니다. 전체를 관통하는 미학적 센스와 표현력이 다른 차원의 것이다. 그러니 보스가 회귀자이거나 외계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그렇다면 보스는 왜 이런 작품을 그렸을까? 쾌락을 쫓아 죄를 범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목적이 크다. 그림 속의 이러한 기괴한 사람들이 바로 당신들이라는 경고를, 그러나 우화적으로 표현하여 교묘하게 메시지를 내는 것이다. 당시에 그림을 구매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왕실, 귀족, 수도원 등 권력층이었다. 이들을 직접적으로 힐난하는 그림을 그릴 수는 없다. 고상해보이는 작품 속에 메시지를 감추어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을 원껏 하는 보스의 영리한 패기다.


그렇다고 하지만, 보스가 이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20년이 걸렸다. 약 40세부터 60세까지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에 매달린 셈이다. 물론 그 사이에도 제단화 등 그에게 들어오는 의뢰를 성실히 수행하며 명망 높은 화가로 이름을 날렸지만, 아무튼 그가 화가로서의 중후반부를 온전히 바쳐 탄생시킨 단 하나의 걸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미술에 문외한인 여행작가가 여행 중 만난 미술 작품을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어느날은 길게, 어느날은 짧게, 어느날은 비평으로, 어느날은 감상으로, 하여튼 미술을 말합니다.

(매주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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