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리뷰 - 파종하는 농부의 심정으로

빌리 브란트 포럼 & 콘놉케 임비스

by 유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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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브란트 포럼


“외국 정상 중 풀네임을 외울 정도로 유명한 사람을 생각해봐.” 갑작스러운 J의 질문에 K의 두뇌가 부지런히 회전한다.


존 F. 케네디, 윈스턴 처칠, 마오쩌둥, 미하일 고르바초프, 샤를 드골, 이런 이름들과 함께 생각나는 독일인 이름,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J가 백과사전식으로 부연한다. “빌리 브란트는 1969년부터 1974년까지 서독의 총리였어. 그전까지는 서베를린의 시장이었고. 총리 재임 중 동방정책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지. 그 공으로 1971년 노벨평화상도 받았어.”

K가 말을 자른다. “그런 거 말고, 그 사진 있잖아. 내가 빌리 브란트를 기억하는 건 그것 때문이라고.”


흑백사진 속 한 거구의 남성이 비석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바닥이 축축하게 젖은 걸 보니 비가 내렸나보다.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Warszawa)에서 1970년 12월 7일 일어난 이 사건으로 빌리 브란트는 전세계급 유명인이 되었다.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세계사의 물꼬를 바꾸어놓았다.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동구권 국가 폴란드의 게토 희생자 추모비 앞에 무릎 꿇고 나치 독일의 전범 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한 순간, 그때까지 서독에 대한 적대감이 하늘을 찌르던 폴란드 국민의 마음에 화해의 씨앗이 뿌려졌다.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동구권 여러 나라 국민의 마음에, 무엇보다 동독 국민의 마음에 화해의 씨앗이 뿌려졌다.


이른바 동방정책(Ostpolitik). 역사책에 나올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J의 입을 막고 K는 빌리 브란트의 이야기를 직접 보고 듣기로 했다. 베를린의 빌리 브란트 포럼(Forum Willy Brandt)에 그의 생애와 업적에 관한 자료를 알차게 전시 중이다. 물론 세상을 움직인 ‘무릎 꿇은 거인’을 포함해서 말이다.


전시관을 둘러보다 말고 K가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심심하면 한 번씩 빌리 브란트가 언급되잖아.”

그 말은 사실이다. 어떤 정치인이 정치적으로 반대편이라 여겨지는 곳에 가서 무릎 꿇고 사과하면 빌리 브란트의 이름이 튀어나온다. 영원한 비교 대상이랄까.


그래서 K는 궁금했다. “내가 웬만하면 다른 나라 정치인에게 관심이 없는데 이 아저씨만큼은 꼭 알고 싶었어.”


“그런데 있잖아. 빌리 브란트는 사과만 한 게 아니야. 자신에게 분노한 폴란드인이 가장 두려워하던 영토 문제를 폴란드의 뜻대로 처리하겠노라 약속까지 했고, 약속을 지켰어. 심지어 자국민에게 욕먹는 것까지 감수하면서 말이지.” 전시 관람 중 J가 K의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풀어주려는 것 같다.


J는 말을 잇는다. “말로만 하는 사과도 큰 용기가 필요한 건 맞아. 그 자체는 박수받을 만 해.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사과 이후의 행동이라고 봐.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빌리 브란트를 소환한 사람들이 그 후에 행동으로 피해자를 위로한 건 보지 못했어. 말뿐인 사과에 빌리 브란트를 갖다 붙이는 건 예의가 아니지.”


농부는 씨앗을 뿌린다. 씨앗 하나당 몇 알의 열매가 보장된다는 약속은 없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했다. 농부는 씨앗을 뿌리고 그저 정성껏 보살필 따름이다. 거기에서 얼마나 많은 수확이 뒤따르든 농부는 정성을 모아 파종하고, 그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


어쩌면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농부의 진심을 담은 파종과 같은 영역이었는지 모른다.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간다. 진심으로 화해의 씨앗을 뿌리고 ‘진인사대천명’의 다짐으로 기다린다. 잇속을 차리지 않고 먼저 마음을 열었기 때문에 그 결실을 본 것 아닐까? 평화라는 게 본디 그러하다. 투자 대비 효율을 계산하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온 마음을 모아 일단 화해의 씨앗을 뿌린다. 진심이 통하고, 하늘이 동하면, 그 씨앗은 평화라는 값진 열매로 보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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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빌리 브란트 포럼 | 우: 노벨 평화상 메달


콘놉케 임비스


다시 밖으로 나온 J와 K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맛집’이라 소문난 식당을 찾았다. 가게 이름은 콘놉케 임비스(Konnopke's Imbiß). 지도를 보고 찾아간 곳에는 다리 밑 허름한 노점이 보인다.


“저기로구나. 겉보기와 다르게 맛이 훌륭한가봐.” K는 안으로 들어가 커리부어스트(Currywurst) 한 접시를 주문했다.


“이래 봬도 1930년부터 차린 소시지 전문점이라고.” J가 100년 가까운 가게의 역사를 짧게 알려준다. “이 자리가 분단 시절에는 동베를린이었거든. 이 가게는 1960년대에 동베를린에서 최초로 커리부어스트를 만들어 팔았어.”


커리부어스트가 무엇인가. 부어스트는 독일어로 소시지를 뜻한다. 즉, 커리부어스트는 ‘커리 소시지’다. 독일이 소시지로 유명한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 명성에 걸맞게 지역마다 특산품 소시지 종류가 어마어마한데, 커리부어스트는 베를린의 명물이다. 부어스트를 만들 때 커리가 들어간 소스를 듬뿍 붓고 커리 가루를 마저 뿌려 완성한다.


“사실 이런 향신료 맛이 독일에는 없는 거잖아.” J가 음식을 기다리는 막간을 이용해 커리부어스트 이야기를 들려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베를린이 분단되었지. 전쟁 직후 폐허가 된 도시를 다시 복원하는 공사가 여기저기서 열렸어. 하지만 전쟁 후 먹을 것이 부족하니 주둔군의 구호 식량을 베를린 시민에게 나눠준 거야. 서베를린에는 미군, 영국군,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영국군의 구호 식량에 커리가 포함되어 있었어. 아무래도 영국이 오랫동안 인도를 식민 지배했으니 그랬겠지. 그런데 커리라는 걸 처음 본 독일인은 이걸로 뭘 해야 할지 몰랐어. 그러다 어느 식당에서 커리를 응용한 소시지 소스를 개발했는데 이게 대박이 난 거지.” 부연설명이 끝나기 전에 이미 음식은 나왔다. 패스트푸드급 속도다.


그 민족의 향토음식과 주둔군의 이국적인 식자재가 만나 새로운 요리의 탄생을 이끈 사례. “이게 말하자면 독일식 부대찌개로구나.” K가 소시지를 한 입 베어 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함께 나온 감자튀김도 열심히 먹다가 K의 머릿속에 갑자기 전구가 켜졌다. “잠깐만! 영국군 구호 식량으로 서베를린에서 만든 요리가 왜 동베를린에 나타난 거야?”


1960년대에 동베를린에서 커리가 쉽게 구할 수 있는 음식 재료였는지 아닌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리 구하기 쉽고 저렴한 재료였다고 해도 서방 세계의 이미지가 잔뜩 묻은 커리부어스트를 굳이 동베를린에서 팔 이유가 있었을까? 설령 팔았다고 해도 인기가 있었을까? 그런데 인기가 있더라는 거다. 동베를린에서도 잘 팔렸다는 거다.


“결국, 맛있으면 장땡인 걸까?” 접시를 비우며 K가 생각한다. 어쩌면 J의 대답이 핵심일지 모른다. “적어도 보통 사람들에게는 분단 상대국을 향한 적개심은 없었던 거지.”


따지고 보면, 우리도 평양냉면을 먹으니까 동베를린에서 커리부어스트를 먹은 게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살벌한 시대에도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상대를 향한 적개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화해하자”며 동독에게 손을 먼저 내민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의 손이 머쓱하지 않았을 것이다. 평화의 씨앗을 뿌린 땅이 척박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다 끝난 다음에 되짚어보면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그 일이 벌어지는 순간에는 세상이 끝장날 것처럼 자존심을 내세우고 고집을 부린다. 지나고 나서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기 싸움이 첨예한 그 순간에는 민족의 존망이 걸린 듯 날이 서 있다. 바로 그때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이 이기는 거다.


커리부어스트를 열심히 먹다 말고 갑자기 J가 말한다. “그런데, 사실 빌리 브란트도 재임 중에는 인기 있는 총리가 아니었대.”


K는 또 의아하다. “왜? 노벨평화상도 받았다며. 분단국가에서 이렇게 평화로 획기적인 진전을 이루었는데 인기가 없었다고?”


“응, 심지어 동독 간첩이냐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서독 내에서는 반대가 컸다고 해. 하지만 끝까지 밀어붙였지. 결국, 지금 와서 보니까 빌리 브란트가 옳았던 거지.” J는 이렇게 대답하면서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똑같은 작가에게 각본을 받은 것처럼 똑같은 일이 한반도에서 벌어졌구나. 독일의 드라마는 해피엔딩으로 끝을 보았는데 우리의 드라마는 어떤 결말을 맞이할까?”


베를린 장벽이 놓인 그해 빌리 브란트는 서베를린 시장이었다. 즉, 그 흉물로 고립된 그 도시의 책임자였다. 빌리 브란트는 누구보다 베를린 장벽에 분노했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미국에게도 도움을 청했으나 미온적으로 나오는 미국에 몹시 실망했다. 빌리 브란트는 물리적인 장벽이 생기면 마음마저 멀어져 결국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어 나중에 통일하기에 더 어려운 환경이 조성된다며 안타까워했다. 어쩌면 그래서 마음을 열기 위해 더욱 노력했는지 모른다. 마음마저 멀어지지 않기 위해. 그것이야말로 씨앗을 뿌리는 농부의 심정 아니었을까?


빌리 브란트가 서독 총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통일까지 15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빌리 브란트가 심은 화해의 씨앗은, ‘교황의 복수’를 운운하며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상대에게 적의를 품지 않도록 하는 큰 밑거름이 되었다.


미워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당장은 갈라져 있어도 마음마저 멀어지지 않는 게 중요하다. 먼저 포용하는 사람이 이기는 거다. 그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열매를 거두는 거다. 대신, 열매를 거둘 때까지 진득하게 하늘의 뜻을 기다릴 줄은 알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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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 : 콘놉케 임비스

<리뷰를 보고 싶어서>

국민학교(초등학교가 아님)에서 숱하게 반공 포스터와 통일 포스터를 그렸고, <간첩 잡는 똘이장군>을 보며 자란 세대입니다. 독일 통일을 TV 뉴스로 보았던 어렴풋한 기억이 있습니다. 18년 동안 독일을 여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수많은 역사의 기록과 기억을 접하는 가운데 통일이라는 주제를 한 발 떨어져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내가 본 리뷰입니다. 특별히 베를린에서 본 통일의 리뷰를 여행 에세이의 형식을 빌려 전합니다.

(매주 화,목,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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