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 기념관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K는 다시 베를린 장벽을 바라본다. 이번에는 벽에 그림이 가득 그려져 있다. 베를린 장벽 잔해가 길게 남아있는 구간의 동베를린 쪽 벽면에 세계 각국의 아티스트가 평화를 염원하는 그림을 그렸기에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라 불린다. 차량과 행인이 오가는 길가에 덩그러니 ‘그림 벽’이 세워져 있다.
“솔직히 대단한 작품이라 보기는 어렵지만,” 그림을 감상하며 걷던 K가 말한다. “그래도 장벽이 실외 갤러리가 된 건 특이하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는 단순히 오픈 전시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대로변에 덩그러니 노출되어 있다. 베를린 장벽 잔해에 평화를 염원하는 작품을 남긴 기념물임은 분명하지만, 이렇게 길 한복판에 노출된 방식을 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법하다.
어떤 작품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거기에는 두 중년 남성이 진하게 키스를 나누고 있다. J가 말한다. “이 그림은 상상의 표현이 아니라 실제 일어난 사건을 옮겨 그린 거야. 제목은 ‘이 죽일 놈의 사랑에서 구원하소서’라고 하지.” 그림 속에서 친밀감을 과시하는 두 남성은 동독과 소련의 대표였다. 그들은 양국의 굳건한 신뢰와 우호를 보여주고자 공개석상에서 진한 스킨십을 나누었다고 한다.
그렇게 ‘죽일 놈의 사랑’으로 끈끈히 뭉쳤던 동독과 소련이 세운 흉물스러운 장벽에 그려진 벽화 갤러리. 몹시 생경하고 이질적이지만, 끌린다. 예술가들이 베를린 장벽에서 영감을 얻어 저마다의 표현력으로 평화를 이야기하는 1km 이상의 긴 장벽을 천천히 구경하며 J와 K는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관람을 마쳤다.
베를린 장벽 기념관도 실외에 오픈된 공간이었지만 어쨌든 기념관으로서 독립된 영역이 존재하였다. 그런데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는 그냥 분주한 길거리에 놓인 벽화 갤러리처럼 아무렇지 않게 도시의 풍경에 녹아들어 있다. 지금도 빈 땅에 속속 대형 쇼핑몰과 빌딩이 들어서는 곳을 무심하게 가로지르는 장벽.
게다가 벽화 위에 마치 뒷골목에서 볼 것 같은 지저분한 낙서와 그래피티도 보인다. 낙서에 무슨 의미가 담겨있는지 한참을 뚫어지라 쳐다보는 K의 속마음을 눈치챘는지 J가 덧붙인다. “그건 문자 그대로 그냥 낙서야. 누군가가 못된 장난을 친 거지.”
그래도 국가 기념물 같은 곳 아닌가? 벽화를 그린 작가의 예술작품 아닌가? 그런데 낙서를 찍찍 그려두다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언젠가 서울에서 어떤 작가가 저항정신의 표현이라며 청계천 광장에 세워진 베를린 장벽에 낙서했다가 사회적으로 크게 물의를 일으킨 기억이 난다. 그런 짓을 독일에서 서슴지 않고 하다니 대체 무슨 일인가.
“워낙 이 부근에 자유분방한 젊은이들의 해방구가 존재하기도 했고, 일단 한 번 오염되니까 너도나도 거리낌 없이 낙서하고, 그 모습을 본 관광객까지도 낙서를 남기니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가 유독 훼손이 심한 것 같아.” 예전에 왔을 때는 한글 낙서도 보여 얼굴이 화끈거렸던 J가 씁쓸하게 말한다.
베를린은 낙서로 훼손된 벽화를 주기적으로 보수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낙서를 막을 의지는 없어 보인다. 미관상 아름답지 않은 펜스를 쳐서 접근을 차단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어차피 펜스 위로 팔을 뻗으면 닿는 정도의 거리여서 아무 효과는 없었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는 주기적으로 더럽혀지고, 다시 보수하고, 또다시 더럽혀지기를 반복한다.
어쩌면 이것 또한 물리적으로 가로막은 ‘꼴 보기 싫은’ 장벽을 향한 누군가의 분노 혹은 조롱의 표시일 테니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어 보인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과거의 한 토막을 보존하고 전시하는 박물관이 아니라, 지금도 메시지를 전달하고 때로는 오염되고 복원되는 과정을 반복하며 삶의 터전에 공존하는 기념관으로서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가 베를린 시민에게 끊임없이 분단의 상처를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꼴 보기 싫은 장벽의 존재는 지금이나 1960년대나 다를 바 없었을 거야. 뭐라도 흠집을 내고 싶은 마음도 같겠지.” 왠지 낙서를 거들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사인펜을 찾아 가방을 뒤지는 K의 손을 붙잡고 고개를 저으며 J가 소감을 남겼다.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 기념관
돌이켜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방문한 수많은 장소는 하나같이 ‘기억’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베를린 장벽 기념관처럼 기억을 위해 보존하고 가꾼 장소도 있고, 체크포인트 찰리처럼 기억을 재미로 승화하여 더 친근하게 접하도록 유도하는 장소도 있고, 브란덴부르크문이나 포츠담 광장처럼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일상적인 장소에서도 기억을 위한 장치가 존재하고 있었다.
K는 지난 여행을 차근차근 복기하며 ‘기억’이라는 키워드를 발견했다. “잊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로구나.”
J가 답한다. “그래 맞아. 심지어 독일로서는 굳이 드러내놓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과거일 수도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더욱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이런 수고를 들였지.”
기억하는 시늉만 하려면 도시 어딘가에 기념비 한두 개 세우고 성의를 다했노라 자기 합리화해도 된다. 박물관 하나 만들어 모든 기록물을 다 모아놓고는 보고 싶은 사람만 보라고 딴청 해도 된다. 그런데 베를린은 통일 후 큰 도시 곳곳에 기억의 장치를 가득 심어놓았다.
K도 베를린의 그러한 수고가 인상적이다. “베를린에 사는 사람은 과거를 외면할 도리가 없겠네. 삶의 영역에 이렇게 드러내놓고 역사를 되새기는데, 일부러 눈 감고 다니지 않는 이상 모든 사람이 다 알게 될 수밖에 없겠어. 피할 방법이 없네.”
J는 K가 언급한 ‘기억’이라는 키워드를 다시 상기시킨다. “그리고 반복해서 보게 되니 절대 잊어버리지 않지. 머릿속에 영원히 저장될 거야.”
J는 K를 마지막 ‘기억’의 장소로 데리고 가기로 했다. “솔직히 재미는 없을 거야. 기분도 유쾌하지 않을 거고.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보고 가는 게 좋겠어.”
전철을 타고 얼마간 달려 베를린 근교 오라니엔부르크(Oranienburg)에 도착했다. 거기서 J와 K는 한참을 걸어 어디론가 이동했다. “대중교통으로 가기 힘든 외진 곳이라 오늘은 많이 걸어야 할 거야.” J가 K를 독려하며 데려간 곳은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 기념관(Gedenkstatte und Museum Sachsenhausen)이다.
스산한 입구를 지나며 J가 당부한다.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Auschwitz)는 들어봤지? 그런데 나치가 만든 강제수용소가 한두 곳이 아니었어.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도 그중 하나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거야.”
K가 묻는다. “그런데 우리는 통일의 리뷰를 보러 온 거잖아. 나치는 분단 이전의 역사 아니야?”
“강제수용소는 대부분 전쟁이 끝나면서 해방됐는데, 불행히도 여기는 분단 후에도 소련이 정치범을 수용하고 가혹행위를 저질렀어. 전쟁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분단의 상처가 더 크게 생긴 거지.” J의 답변을 들으며 스산한 입구를 바라보고 있자니 K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책에 둘러싸인 흉흉한 벽을 지나 입구로 들어서면 황량한 공터에 드문드문 군부대 생활관처럼 생긴 허름한 가건물 몇 채가 보인다. “다 허물어버리고 저만큼만 남겨놓은 거야.” J가 남은 가건물을 가리키며 말한다. “기념관으로 사용할 만큼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다 치워버린 셈이지.”
하지만 지도를 둘러보던 K가 말한다. “다 치워버리고 남은 게 이만큼이나 된다고? 다 보려면 최소한 반나절은 걸리겠는데.”
‘기억’을 위한 수많은 자료가 기념관 곳곳을 가득 채운다. J는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 기념관에서 접하게 될 전시의 카테고리를 크게 넷으로 나누어 알려주었다. “수용된 피해자들의 지옥 같은 일상, 그리고 그 지옥을 운영한 나치 책임자들의 실명 고발, 생체실험 등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운 나치의 전범 행위로 나눌 수 있고.” 분단의 리뷰는 네 번째 카테고리였다. “마지막이 소련에서 정치범수용소로 사용한 5년간의 기록이야.”
1945년 전쟁이 끝나고 나치가 패망한 뒤 베를린 등 독일 동부를 차지한 건 소련이었다. 수도 베를린은 승전국이 넷으로 나눠 통치하였지만 오라니엔부르크처럼 베를린 외곽에 있는 곳은 모두 소련 차지였다. 소련은 나치가 만든 강제수용소를 그대로 살려 특수 수용소를 만들어 1950년까지 정치범을 가두고 못된 짓을 저질렀다. 그 시절의 자료가 별도 전시실에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다.
강제수용소 다크투어는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사진과 영상, 수기, 실제 사용한 물품과 열악한 환경을 보고 있노라면 속이 울렁거릴 수 있다. 특히 생체실험에 관한 섹션은 마치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처럼 불쾌한 기억이 선명하게 뇌리에 각인될 정도로 강렬하다.
“한 번 생각해봐.” 미간을 찌푸린 K에게 J가 화두를 던진다. “독일이 나치의 나쁜 짓을 공개하며 과거를 반성한다고 치자. 그런데 소련은 경우가 다르잖아. 독일의 입장에서 자기반성의 영역은 아니야.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를 기념관으로 만들 때 나치의 행위만 고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소련이 저지른 짓도 잊지 않는단 말이지. 무슨 의미일까?”
“나쁜 놈에 명찰 달아 구분할 필요가 있나? 이놈이나 저놈이나 나쁜 짓을 했으면 기록해두어야지. 그래야 기억하고 기념할 수 있지.” K의 답을 들으며 우문현답이라고 J는 생각했다.
모든 역사는 연결되어 있다.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 그 원인이 되는 다른 사건이 있기 마련이다. 또한,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그 후에 일어나는 또 다른 사건이 있기 마련이다. 그중 어떤 하나의 장면만 발췌하여 기억하는 건 어떤 면에서 보면 무의미하다. 아니, 그것은 기억을 훼방하려는 목적이 내포된 방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연히 모든 과정을 기록하고 알려주어야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는 법이다.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사람들도 온전히 이해하고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하나만으로도 불쾌함이 짙게 드리울 어두운 역사를 두 겹으로 기록하고 기념하는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 기념관은, 결국 전쟁과 분단의 역사는 서로 분절되지 않은 일련의 과정임을 알려주는 셈이다. 통일을 알기 위해서는 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함을 알려주는 셈이다.
다시 기차역까지 한참 걸으며 J가 다시 화두를 꺼낸다. “베를린은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눈에 보여.”
K가 생각을 말했다. “단순히 잊어버리지 않기 위함이면 학술 자료로 정리해 캐비닛에 보관하고 전문가들만 열어봐도 될 텐데, 역사에 관심 있든 없든 누구나 일상의 현장에서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단 말이야. 여기에 사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명령 같아.”
J도 같은 생각이다. “눈에 보여야 잊어버리지 않아. 눈에 보여야 기억할 수 있어. 그리고 나쁜 과거를 기억해야 다시는 그런 일을 되풀이하지 않지. 그래서 베를린은 기억을 멈추지 않아. 절대.”
<리뷰를 보고 싶어서>
국민학교(초등학교가 아님)에서 숱하게 반공 포스터와 통일 포스터를 그렸고, <간첩 잡는 똘이장군>을 보며 자란 세대입니다. 독일 통일을 TV 뉴스로 보았던 어렴풋한 기억이 있습니다. 18년 동안 독일을 여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수많은 역사의 기록과 기억을 접하는 가운데 통일이라는 주제를 한 발 떨어져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내가 본 리뷰입니다. 특별히 베를린에서 본 통일의 리뷰를 여행 에세이의 형식을 빌려 전합니다.
(매주 화,목,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