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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May 30. 2019

벨 에포크의 아름다움 뒤엔

미셜 오슬로 감독의 영화 <파리의 딜릴리>를 보다

영화는 딜릴리라는 제3세계 여자아이의 소개를 시작으로 진행된다. 딜릴리는 프랑스 아버지와 카나키(지금의 뉴칼레도니아)인 어머니의 혼혈아로 카나키 에서는 피부색이 하얗다는 이유로 하얀 프랑스인이라고 불려졌고 그런 차별들을 피해 프랑스로 향하는 배에 밀항하게 된다. 하지만 딜릴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프랑스에서는 딜릴리를 까만 카나키인 이라고 부르며 만국박람회 원주민 인류관에 ‘전시물’로서 파리 시민들의 구경거리로 관람되어진다.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 원주민과 동물은 차이가 없었다


이 부분에서 16세기 제국주의 시절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민족 우월의식과 식민지배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이 <인간 동물원> 사진이 떠올랐다. 사진 속 사람들은 이 흑인 소녀를 마치 원숭이에게 먹이를 주듯 바나나를 건네고 있다.


왜 감독은 딜릴리를 주인공으로 설정했을까?

자신을 원숭이라고 부르는 기사 아저씨에게 딜릴리는 말한다.


"전 이해해요. 저도 아저씨를 보고 돼지를 닮았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인종차별의 시작은 항상 백인으로부터 내려다 보였다. 하얀 백인들이 그들과 다른 인종들을 이상하게 여기고 그들의 존재를 신기하게 바라본다. 인종차별 운동은 항상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들에 의한 백인에 대한 투쟁이었고 그 투쟁으로서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들은 백인들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게 됐지만 백인들은 한 번도 내려온 적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이전과 다름없이 그 위치에 계속 서 있었을 뿐. 하지만 순수한 딜릴리에게는 백인들 또한 마찬가지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기한 인종일 뿐이다. 다른 점은 딜 릴리는 자신을 차별하는 그들과는 다르게, 계속 보다 보면 익숙해진다며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한다. 감독은 이런 딜릴리의 시선을 통해 이 영화를 편견 없이 봐달라는 입장을 전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영화는 그런 딜릴리를 중심으로 여자아이를 유괴하는 비밀조직 마스터 맨들의 음모를 파헤치는 서스펜스극으로 서사가 시작되며 궁극적으로 파리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하는 감각적인 페미니즘 영화로 보이고 싶어 하는 듯하다. 딜릴리가 쫒고 있던 비밀조직은 사실 여성의 권리 상승으로 인해 피해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의 모임이었고 지금의 무질서한 파리를 개혁시켜 예전 남성들이 주도하던 명성의 파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세력들이 지하수도에 숨어 여성들을 납치 해 수면 아래에서 그녀들을 네발이라고 부르며 까만 천을 뒤집어 씌운 채 얼굴도 들지 못하게 하고 네발로 걷게 한다.


마스터 맨의 우두머리는 분노에 차서 이렇게 얘기한다.”여자들이 건방지게 살롱이라는 것을 만들어 자기가 초대하고 싶은 사람만 초대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과만 어울린다”라고. 어쩌면 이 영화는 차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비단 여성에 대한 차별뿐 아닌 인종에 대한 아니, 사회적 통념의 약자에 대한 차별과 평등. 휴먼 라이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딜릴리가 비밀 단체를 파악하기 위해 만나게 되는 조연들의 등장은 당최 무슨 개연성인지 의문을 자아낸다. 프랑스어로 “좋은 시대”라는 뜻의 벨 에포크 시대를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과 예술가들 또 파리의 아름다운 풍경과 건축물, 상류 사교계 문화인 살롱과 캬바레. 물론 그 조연들의 등장이 딜릴리가 위기에 쳐해 졌을 때 중요한 단서 역할을 하긴 하지만.. 굳이 꼭 필요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서스펜스극으로 위장되어 자신들의 벨 에포크 시대(자신들의 좋았던 시절)를 뽐내는 듯하다. 이 잘난 척(?)은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악당들을 물리치고 유괴된 아이들을 다시 그들의 부모에게로 되돌려 보낼 때 가장 극에 달한다. 커다란 비행선에 주렁주렁 매달린 장식용 전구들과 보석으로 온몸을 치장한 프리마돈나의 소프라노, 하늘에 수놓은 수억 개의 별과 에펠 타워! 과하다 싶을 정도로 과시적인 장치들이 오히려 그들의 의식을 의심하게 하고 반감을 사게 한다.

“우리 파리는 이렇게나 아름다워 심지어 정의롭기도 하지! 그리고 가여운 우리 딜 릴리, 외로워하지 마 우리는 널 사랑한단다! 네게 백인 소녀처럼 옷을 입히고 프랑스 상류계층 예절 교육을 시킬 것이지만.”

이 수직적인 시각에서의 인권운동이 마치 영화 속 알폰스 무하가 자신의 애완용 치타에게 실내 정글을 만들어주는 것과 같이 느껴지는 것은 비단 내 생각일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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