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의 안과 밖 _21대 총선을 기록하다 1
이날을 손꼽아 기다려온 사람들
보통 정해진 출근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출근하는 저는 어제도 그렇게 출근했습니다. 사무실 앞에 도착하니 낯선 사람들 네댓 명이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출근하는 저를 반갑게 맞이 합니다. 마치 연예인 콘서트를 기다리는 방청객처럼, 마치 백화점 마감 세일을 기다려온 손님들처럼! 이분들은 도대체 누구시길래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요? 이분들은 다름 아닌 내년에 치러지는 총선에 출마할 예정인 후보자들입니다. 법적인 정식 용어로는 '입후보예정자'라고 합니다.
2019년 12월 17일, 어제는 내년에 치러질 21대 국회의원선거의 선거일전 120일이었습니다. 내년 총선까지 대략 120일 남았다는, 그러니까 4개월 뒤에는 총선이 치러진다는 의미입니다. 일반 국민들은 큰 관심이 없으시지만 이 날을 기다려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내년 선거에 출마하려는 사람들이죠. 왜냐하면 바로 이날부터 비록 제한된 범위 내이긴 하지만 부분적인 선거운동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날을 기다린 건 절대 아니지만 이날에 주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로 저처럼 선거관리위원회에 근무하는 선관위 직원들입니다. 우리나라 선관위가 관리하는 주요 공직선거의 실질적인 시작이 바로 이 '예비후보자' 등록부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공직선거 절차에 따르면 예비후보자 등록부터 실질적인 입후보 절차가 시작되고 관련 업무도 폭증합니다. 투표 및 개표 작업을 위한 준비도 시작되고, 선거법 관련 문의와 선거법 위반 행위에 대한 신고제보도 급증합니다. 선거를 국민들의 지지를 획득하여 공직을 얻기 위한 게임이나 경기로 비유하는데 그래서 선관위 공무원들에게나 입후보예정자들에게 예비후보자 등록일은 그 경기의 출발점에 해당합니다. 출마 예정자들은 경기에 참여하는 주자로서, 선관위 공무원들은 그 경기를 진행하는 심판으로서.
선거가 왜 이리 많아
예비후보자 등록일이 되고 새로운 선거가 임박했음을 알게 된 일반 국민 대다수의 반응은 솔직히 "그래서 어쩌라고?"인 것 같습니다. 이런 반응은 아마도 지난번 선거를 통해 정치권력을 획득한 우리 국회의원들이 지난 4년간 보여준 행태에 대한 냉소와 비판을 담은 반응일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선거가 왜 이렇게 많아?"라는 반응도 마찬가지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제도권 정치의 틀로서 대의제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이상 국회의원 선거는 4년마다 어김없이 돌아오고, 또 그 선거에 출마하려는 입후보예정자들도 이날 예비후보자 등록일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공직선거를 직접 관리하는 선관위 직원으로서 저는 일반 국민들보다 좀 더 선거 과정과 선거를 둘러싼 국민들의 정치적 의사 형성 과정에 가까이 있다고 느낍니다. 일반 국민들과는 조금 다른 내부자의 입장이기도 하고,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 정치적 의사가 어떻게 결집되는지, 선거와 정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태도가 어떻게 표출되는지를 가까이서 목격합니다. 따라서 선거과정에 대한 일반국민들의 관점과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선거를 직접 체험하고, 다양한 정치적 현상을 매우 근거리에서 목격합니다. 이 글은 그런 독특한 입장에서 바라본 우리의 선거제도와 정치 현실의 매우 구체적인 움직임에 대한 기록이 될 것입니다.
예비후보자가 되면 할 수 있는 것
그러면, 왜 내년 총선에 출마하려는 출마 예정자들은 예비후보자 등록일을 손꼽아 기다릴까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나라는 선거운동의 자유가 매우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거에서 자신이 당선되기 위해서나,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서, 혹은 다른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서 하는 활동을 선거운동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이 선거운동이 언제나 가능한 나라가 아닙니다. 선거에 따라 대통령 선거는 22일 간, 그 밖의 다른 선거는 13일 간만 선거운동을 할 수 있습니다. 즉, 일 년 내내 선거운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거죠. 다만, 예외적으로 트위터, 카카오톡, 각종 SNS, 이메일 등 온라인 선거운동과 문자메시지를 이용한 선거운동은 언제나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예비후보자로 등록한 사람에 한해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추가로 선거운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출마 예정자들에게는 예비후보자 등록일이 중요합니다. 예비후보자로 등록해서 명함도 돌리고,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고, 어깨띠도 하고, 전화도 돌리고, 선거사무소를 차려 거기에 현수막도 게시하고, 예비후보자 홍보물도 우편 발송하는 등 부분적인 선거운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죠.
예비후보자로 등록한 사람들만 이런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는 건 예비후보자로 등록하지 않으면 이런 식의 선거운동을 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원래 예비후보자 제도가 도입된 취지도 정치 신인들이 기존의 현직 국회의원 등 기성 정치인에 비해 자신을 알릴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에 기회균등과 형평성의 차원에서 선거운동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현직 정치인들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자신의 인지도를 높일 기회나 행사가 많기 때문이죠. 현직 국회의원들은 후원금도 모금할 수 있고, 의정활동도 할 수 있고, 지역구 사무실에서 민원 상담도 할 수 있으니까요.
예비후보자가 되려면 특별한 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는 피선거권이 있어야 합니다. 25세 이상의 우리나라 국민은 국회의원 피선거권이 있으니 국회의원 선거에 나올 수 있습니다. 지역구 국회의원인 경우에도 지역 거주 제한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부산에 주소를 두고도 서울에서 출마할 수 있는 거죠. 부산사람이 서울에서 표를 얼마나 모을 수 있는지 여부는 모르겠지만 법적으로 제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아무나 예비후보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비후보자로 등록을 하려면 먼저 기탁금의 20%를 납부해야 합니다. 국회의원 선거의 기탁금이 1,500만 원이니까 그 20%인 300만 원을 먼저 내야 하는 거죠. 그렇게 등록을 하고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예비후보자' 자격을 얻고 부분적인 선거운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드디어 '예비후보자'가 되신 분들께
다소 복잡한 서류를 작성하고 드디어 '예비후보자' 신분을 취득(?)한 출마 예정자들은 즐거운 표정으로 직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기도 하고, 기다리고 있던 방송사 취재팀과 인터뷰를 하며 자신들의 소신과 포부를 밝히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벌써 팀을 이뤄 자신들의 예비후보자 등록 과정과 언론 인터뷰 장면 등을 사진과 영상에 담아 SNS 게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전부는 아니지만 정말 아이처럼 좋아하고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입니다. 뭐가 그리 좋을까요? 예비 정치인으로서 이미지 관리의 의도도 전혀 없지는 않지만 제가 가까이서 이분들의 표정과 행동을 관찰해 본 결과로는 이분들은 이런 정치적 과정과 선거 자체를 즐기는 듯했고, '예비후보자'가 되어 선거운동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에 정말 기뻐하는 분들입니다.
이제 '예비후보자'가 된 분들은 거리로 나가 유권자를 만나며 거리에서 자신의 명함도 돌리고 인사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지지자뿐만 아니라 반대자도 만나게 될 것이며 내미는 명함을 뿌리치는 유권자들의 차가운 손과 불신의 시선도 접해야 할 것입니다. "선거 때만 되면 웃으며 인사한다."는 일반 시민들의 냉혹한 평가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소명은 언젠가 우리 유권자들도 많은 예비후보자들처럼 선거를 손꼽아 기다리고 즐길 수 있는 신뢰와 기대의 정치문화를 가꾸어 나가는 일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