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호 교수의 책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를 읽다
학창 시절, 내 기억으로는 소위 명문대를 나오신 선생님들 수업 중에 이해하기 어려운 수업이 많았다. 무언가 많이 알고 계시고 그걸 우리에 알려주려는 의욕은 넘치시는데 무슨 말을 하시는지 잘 전달이 안 되는 수업들이 유독 많았다. 명문대생의 고시 합격기나 공무원 수험기를 읽어볼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어쩜 당연하다. 머리가 좋고, 집중력도 좋고, 이해력이 좋은 그들은 '우리'와는 달리 너무 쉽게 이해하고, 너무 잘 집중하고, 그래서 어떤 시험이든 수월하게 합격하는 것이다. 이들은 한 번도 공부못하고, 이해력 딸리는 학생 입장이 되어 본 적이 없어서 그들의 입장을 잘 모른다. 그래서 이들의 합격기는 우리와 같은 '중생'에게는 큰 도움이 안 되는 것이다.
입장이 다르면 이해가 어렵다
엄기호 교수가 학생들과 같이 쓴 책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는 명문대 출신이지만 설명을 잘 못하시는 '일부' 선생님들과는 달리 주목받지 못하는 주변부 청춘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대변한다. '20대와 함께 쓴 성장의 인문학'이라는 부제처럼 이 책은 우리 시대 청춘들의 고민과 아픔, 성장과 좌절을 다룬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청춘이라고 해서 다 같은 청춘은 아니듯 이 책은 우리 시대의 대부분의 청춘들 중에서도 특히나 배제되고 무시되는 청춘들을 다룬다. 대학 입학시험 성적이라는 지표에 따라 철저하게 서열화된 우리나라 대학 서열에서 저자가 몸 담고 있는 대학처럼 이른바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라는 주류 서열에서 벗어나 '이하잡'에 속하는 대학의 학생들과 함께 사유하고 질문하며 자신들의 삶의 본질을 이해하는 과정을 기록한다. 그래서 '잉여'가 된 우리 시대의 청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지, 그들에게 가해지는 "요즘 젊은이들은 힘든 일은 안 한다." 든지 "요즘 젊은이들은 도전과 저항정신이 결여돼 있다." 는 기성세대의 언어가 어떻게 폭력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김예슬과 대학 거부선언
그래서였다, 이 책을 읽으며 나의 고교시절이 생각났던 것은. 사실 출간된 지 꽤 된 이 책을 손에 쥐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에 소위 '대학 거부 선언'으로 이름이 알려진 고려대 자퇴생 김예슬의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를 읽으려던 참이었다. 그에 관한 기사를 검색하다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되는 또래들의 거부반응이 처음에 의아했고, 나중엔 그런 반응들을 집대성하여 분석한 책이 바로 이 책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임을 알게 된 것이다. 소위 소수 명문대 학생들과 언론의 대대적인 조명과는 달리 대다수의 일반 대학생들의 반응은 오히려 "김예슬, 넌 명문대생이니까 자퇴해도 주목이라도 받지, 우리가 대학이 썩었다고 자퇴한다면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을 걸? 그러니, 우리 보고 어쩌라고?"라는 냉소였던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주류에서 밀려난 우리 시대 '김예슬이 아닌' 보통 청춘의 냉소를 추적한다. 기성세대에게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고, 낯설고, 마땅찮은 청춘의 삶과 사랑, 교육과 정치, 돈과 가족에 대한 생각들과 성장의 모습을. 때론 열정적이고 때론 무기력한 민낯 그대로의 모습을.
이 책이 처음 출간된 시기가 2010년이므로 당시 20대는 이제 어언 30대에 도달했으리라. 그리고 요즘은 심지어 지금의 20대는 지금의 30대와도 또 다르다는 이른바 '밀레니얼 세대론'이 등장했다. 그러나 미묘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의 청춘이 놓인 사회경제적 조건들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을 듯하다. 사회경제적으로는 여전히 높은 청년실업률을 배경으로 고강도 취업전선에서 대다수는 낙오와 탈락을 반복해야 하고, 정치와 사회참여에 대해서는 견고한 냉소와 무관심을 보이며, 도전정신과 열정과는 거리가 먼 잉여의 삶을 하루하루 버티며, 미래의 취업과 자신의 삶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대학을 수천만 원의 빚을 져가며 다니며, 1%의 취업 가능성과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수많은 스펙과 외모를 관리해야 하는 젊음이 오늘을 사는 청춘의 보편적인 모습이다.
이 책의 요지는 거칠게 말하면, 이런 청춘에 대해 기성세대가 퍼붓는 비난은 달라진 청준의 존재 기반을 고려하지 않은 부당한 매도이자 몰이해라는 것. 그 비난의 바람이 오른쪽에서 불어 오든, 왼쪽에서 불어 오든. 기성세대가 보기에 오늘을 사는 젊음은 주체적 성장과 성숙과는 거리가 먼 여전히 어린 존재이거나, 도전과 저항정신은 안중에도 없는 무개념과 무관심의 이기적이고 의지박약의 나약한 존재이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열정도 없으니 심지어 사랑할 용기도, 마음도 없다. 정체성이 부족하니 타인의 평가에 좌지우지 되는 외모 경쟁에만 매달리고, 미래를 위한 계획과 준비보다는 무의미한 연예인 덕질이나 드라마 정주행에 몰입하고, 단편적인 말장난과 아까운 시간만 잡아먹는 게임에 빠져든 잉여의 삶. 그렇게 사회에서 제 자리를 찾지도 못하고 용도 폐기되거나 임시방편용으로 단기에 소비되고 말 불완전한 존재. 이런 존재가 기성세대가 보는 오늘의 청춘의 모습이다.
그러나, 저자의 생각으로는 기성세대의 이런 인식은 오늘의 청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피상적인 인식이다. 오늘의 청춘도 과거의 청춘 즉, 기성세대가 그랬듯이 아무 생각 없이 시간만 허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얼핏 보기에는 한심해 보이는 말투와 행동거지 속에는 그들만의 논리와 사유의 결정이 숨어있다. 오늘의 청춘도 자신들의 직업과 미래, 학문과 사랑, 정치와 사회에 대해 나름대로 사유의 틀을 갖고 있으며 그 깊이가 결코 과거 청춘의 그것과 비교해도 낮지 않다. 오히려 오늘날 사회의 복잡성에 비추어 볼 때 더 깊은 고민과 사유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저자가 지난 몇 년간 대학에서 이 청춘들과 수업을 함께하고, 생각을 나누고, 질문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내린 결론은 그래서 이것이다.
너흰 괜찮아.
오늘의 청춘에게 보내는 저자의 이해와 위로에 공감한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이 책이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제자들에게 무한 희생과 열정 페이를 강권하고, 결과적으로 제자들의 푼돈마저 책값으로 뜯어가는 근거 없는 '청춘특권론'의 전도서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은 오늘의 청춘을 있는 그대로, 그들이 밟고 서 있는 지평에서 바라봐 줄 것을 정당하게 요구한다. 비록 오늘을 사는 법에 대한 각자의 답이 다를지라도 서로를 이해하려면 적어도 세대를 초월해 각자가 딛고 있는 입장을 살펴보고, 각자가 쏟아내는 서로 다른 언어에 귀 기울일 것을 요청한다. 그래서 저자가 책의 막바지에서 강조하는 입장은 이것이다.
hic Rhodus, hic salta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이제는 꽤 유명해진 이 라틴어 격언은 원래 이솝 우화에서 나온 것이다. 로도스란 곳은 그리스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소아시아 서남쪽 해안에 있었던 섬이다. 당시에는 무역과 교통의 요지로 번성했고 지금도 실존하는 그리스의 섬이다. 원래 전투용 기술경쟁에서 기원한 올림픽 경기도 이곳 로두스 섬의 제우스 신전의 경내에서 거행되었으며, 모든 그리스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국제적인 사교장이기도 하였다. 이솝우화에 따르면 이 격언은 자신이 로두스 섬에서는 그 누구보다 더 높이 뛰었으며, 그 누구보다 더 빨리 달렸다고 허풍과 너스레를 떠는 한 젊은이에게 군중 속의 누군가가 던진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이후 이 격언은 독일 철학자 헤겔 Hegel이 인용하고, 맑스 Marx가 재인용하면서 과장과 허풍에 대한 경계에 더해 현실적 지평을 무시한 철학적 사유에 대한 비판으로 읽혔다. 이 책의 저자가 말미에 제시한 이 격언은 이 책에 대한, 이 책이 제기했던 문제의식에 대한 비판으로 들릴 수도 있다. 사유를 자극하는 이 책의 많은 장점과 지극히 정당한 오늘의 청춘에 대한 옹호에도 불구하고, 이 책도 역시 세대론이 갖은 일반화의 한계를 갖는다.
어떤 세대나 그 시대만의, 그 세대만의 고유한 문제뿐 아니라 시대를 관통하는 보다 근본적인 체계와 구조에서 기인하는 보편적인 문제들이 있었다. 어쩌면 한 시대의 문제조차 이런 보편적인 문제 속에서 제기되고 해소되고, 던져지는 것이 아니던가? 세대론이 간과하기 쉬운 것은 이런 시대를 초월한 물음의 보편성이다. 어떤 시대나 모두가 '김예슬'은 아니었지만 소수의 '김예슬'은 존재하고, 직접적으로 체계를 벗어나려 몸부림치고 뛰쳐나갔다. 일자리 없는 시대의 무의미한 직업 양성소가 된 대학을 직접 떼려 치지 않는다고 해서 고민이 없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기에 기성세대가 이들을 비난할 정당성도 없듯이, 누구보다 예리한 감성과 통찰로 누구보다 먼저 이 체계에서 뛰쳐나갔다고 해서 그에게 냉소로 답하는 것도 정당하지 않다. 먼저 뛰쳐나간 '김예슬'이든, 아직 남아서 '어쩌라고?'를 외치는 '김예슬이 아닌 청춘'이든 모두가 여기서 자신들이 뛸 수 있는 최대한을 뛰려고 하고 있는 것이니까.
책 속의 문장들
-우리 사회의 언어가 무엇이 잘못되고 어디서 어긋났는지에 대해 해답이 같다는 것을 입장이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입장이 같다는 말은 같은 위치에서 같은 질문을 던진다는 뜻이다.
-착취조차 당하지 못하고 완전히 잊힌 존재가 되어 한번 쓰이지도 못한 채 용도 폐기될지도 모른다.
이들은 자신이 잉여가 될지 모른다는 공포를 넘어 이미 하루하루의 삶에서 자신들이 잉여로 만들어지고 있음을 경험하며 자학하게 된다.
-너무 많이 일고 너무 잘 알아서 정치에 냉소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낯선 존재와 부딪치면서 나의 존재와 세계가 붕괴하는 것을 경험한다.
-쿨함은 이 시대 젊은이들의 도덕이자 미학이다.
-이들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것보다 캠퍼스에서 사랑이 죽어버린 것이야말로 청춘의 진정한 죽음이다.
-사랑은 더 이상 무엇인가 새롭게 생산하는 에너지가 아니다.
그것은 실컷 즐기다가 낡으면 버리는 청바지와 같은 것이다. 사랑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사랑이 지속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진 것이다.
-과거의 사랑이 손해를 감수하고 일방적으로 퍼줌으로써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였다면,
지금은 등가교환을 통하여 서로의 곤궁함을 배려한다.
-피난민의 삶은 기획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삶이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되었는데 어떻게 사랑이 임시적이지 않을 수 있는가.
그리고 이 임시적인 사랑, 그것은 왜 또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때 비로소 사람이 된다. 인정투쟁
품평. 그것이 우리 시대의 의사소통법이다.
-캐릭터는 끊임없이 자신을 치장하고 드러내야 한다.
-우리는 상품에 대한 소비에서 타인의 시선을 소비하는 것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는 타인의 시선을 소비하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을 소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몸은 옷 안에 감추어진 '자연'이나 스타일을 통해서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옷을 통해서 드러나야만 하는 '문화'이다.
-과거에 국가는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보호하기 위해 국민의 신체를 국가의 감시 밑에 두었다.
-다이어트는 자기 자신과의 인정투쟁이기도 하다.
-친구들과 만나는 횟수가 곧 뱃살의 무게였다.
-파워포인트에는 파워도 없고 포인트도 없다.
-사생활은 내가 사회로부터 물러날 수 있는 권리이다.
-돈은 추상화하는 힘이다.
돈은 숫자의 형태로 그 이면에 가려진 피와 땀, 그리고 개별적인 사건들을 모두 가려버린다.
-어떤 일은 왜 열정이 되고 다른 일은 왜 삽질이 되느냐?
-아무 생각 없이 산다고 비난하는 우리야말로 그들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이, 실천보다는 입장이 더욱 중요하다.
이방인을 환대하지 않는 공동체는 성장할 수 없다.
정답만을 추구하는 공동체에서는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없다.
-바쁨과 분주함의 차이. 적극적 수동성, 리처드 세넷
-세상은 사람들 사이에 놓인 것이며,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은 그 세계 속에 태어나는 것, 한나 아렌트
-불가능한 곳에서 가능함을 상연하는 것, 그것보다 멋진 혁명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