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리 젠킨스 감독의 영화 <문라이트>
뭐가 될지는 언젠가 네가 스스로 결정해야 해.
그 결정을 남에게 맡기지 마.
배리 젠킨스 감독의 영화 <문라이트>를 보았습니다. 영상으로 써 내려간 한편의 시 같은 탁월한 영상미, 마음을 파고드는 서정적인 음악은 더욱 영화의 감동을 오래 지속 시켰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 차가운 차별의 시선으로 다수의 편견과 경멸에 시달리는 성적 소수자의 이야기를 아름답고 진지하게 그린 연출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영화는 각각 '리틀', '샤이론', '블랙'이란 타이틀의 3부작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주인공 샤이론의 별칭이기도 합니다. 또래 친구들에게 놀림의 대상이 되어 늘 쫓기던 흑인 꼬마 '리틀'이 마약상 후안 아저씨의 '물류창고'에 숨어들면서 영화는 시작합니다. 곤경에 처한 리틀에게 애정을 느끼며 따뜻하게 말을 걸고, 먹을 것을 주고, 집에 데려와 하룻밤을 재워주는 후안은 리틀에겐 결여된 부모의 보살핌을 아마도 처음으로 제공하는 존재인듯 합니다. 결핍된 부성애와 부족한 모성애를 동시에 채워주는 듯하기도. 어느 날 후안이 리틀을 바닷가에 데려가 수영을 처음 가르쳐 주는 장면은 흡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끌어안고 있는 마리아의 이미지 즉, '피에타'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리틀이 앞으로 살아갈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외로울지 암시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삶과 희망 없어 보이는 막막함 속에서 자신이 무엇이 될지, 어떻게 살아갈지를 리틀은 스스로 결정해야 하겠지요. 그래서인지 저에겐 후안이 리틀에게 수영을 가르쳐 주는 장면은 단순한 수영 기술의 교육일 뿐 아니라 이 험난한 세상에서 리틀이 갖춰야 할 실존적 자세를 교육하는 장면이기도 하고, 마치 종교적인 세례 의식 같기도 했습니다. 후안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너는 세상의 가운데 있는 거야.
뭐가 될지는 언젠가 네가 스스로 결정해야 해.
그 결정을 남에게 맡기지 마.
하지만 후안은 리틀에게 모순적인 존재인 듯합니다. 한편으론 자신의 친어머니에게서 받아보지 못한 부모의 사랑을 주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마약을 파는 후안은 동시에 그 결핍된 모성애의 원인이기도 하지요. 어쩌면 샤이론을 둘러싼 인물들과 샤이론의 관계가 대부분은 이런 갈등과 애정의 모순적 긴장관계로 설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 영화의 긴장도를 높여주면서 더 큰 감동을 불어 일으키는 듯합니다. 어쩌면 샤이론에게 세상은 늘 그런 긴장과 갈등 속에서 혼자 헤엄쳐야 하는 바다일지도 모른다는 암시처럼 말입니다.
네가 뭐가 될지는 언제가 스스로 결정해야 해. 그 결정을 남에게 맡기지 마.
조금 더 시간이 흘러 꼬마 리틀은 더 내성적이고 의기소침해진 십대 샤이론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든든한 후견인이었을 후안 아저씨는 이젠 등장하지 않는데, 아마도 거리의 삶이 주는 극단의 위험성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씩 드러나던 샤이론의 성적 정체성은 이제 어느 정도 확연해져서 동시에 또래 친구들로부터 배척과 경멸의 대상이 되어있습니다. 늘 물기를 머금은 샤이론의 눈은 그 어떤 말보다 더 처연하게 샤이론의 외로움과 절망을 드러내 줍니다. 그래서 자신의 유일한 선망의 대상이자 친구인 케빈에게 샤이론은 이렇게 말합니다.
난 너무 많이 울어서 때로는 내가 눈물이 될 것 같아.
샤이론에겐 가장 감수성이 예민할 시기인 소년기가 아마도 엄마의 말라버린 얼굴처럼 가장 힘들고, 고단하고, 황폐한 시간이었을 테지만 동시에 친구 케빈과 그 마이애미 해변의 달빛 아래에서 나눈 기적 같은 시간은 가장 행복하고 소중한 떨림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토록 소중한 존재인 케빈이 바로 샤이론의 삶을 고난과 일탈 속으로 밀어 넣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지요. 가장 친한 친구인 케빈과의 에피소드는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에 대한 선택과 지난 삶과의 단절을 앞당기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케빈 스스로 의도하지는 않은 일이었지만. 결국 최대한의 고통은 최대의 행복한 시간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모순.
자신의 강함을 보여주지 않고는 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던 십대 샤이론은 자신을 집요하게 괴롭히던 테렐에 분노를 폭발시킴으로써 마침내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갈지 선택한 듯 보입니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지나 우린 그 선택의 놀라운 결과를 마주하게 되지요. 자신의 유일한 친구이자 영혼의 위로였던 케빈이 늘 부르던 이름 '블랙'으로 돌아온 샤이론. 그는 마이애미를 떠나 애틀랜타에서 얼마 간 소년원 생활을 했고 후안과 같은 '성공한' 마약상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후안과 똑같은 마약상이 됨으로써 그는 그리운 아버지의 품으로 귀의한 것일까요?
그토록 강인해 보이는 골격과 근육질의 외양 속에 감쳐진 20대 마약상 샤이론의 가녀린 감성은 10여만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사춘기 그의 유일한 첫사랑이었던 케빈의 '미안하다' 는 떨리는 목소리에 무너져 내린 듯 합니다. 그후 어느날 샤이론은 마이애미의 케빈을 찾아가게 됩니다. 아마도 누구나 오랜 기억 속의 첫사랑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런 상황이 연출될 것이지요. 약간의 어색함과 겸연쩍음, 그리고 불안감과 두근거림 속에서 조심스레 상대의 반응을 살피는 일. 그리고 그 어색한 탐색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 찾아오는 편안함.
영화 포스터가 잘 보여주듯 이 영화는 흑인 소년 샤이론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외롭게 성장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영화 포스터에 나란히 배치된 세 배우의 이미지는 영화의 주제를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게 아닐까요.
리틀, 사이론, 블랙. 흑인 소년이라는 단일한 색깔을 가진 존재이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시기를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며 빚어내는 아름다운 이야기. 리틀, 샤이론, 블랙. 샤 이론의 이 세 가지 모습은 서로 다른 각각의 단계이자 서로 다른 삶의 색이면서도 결국의 서로를 부정하거나 배척할 수 없는 하나의 모습, 하나의 색이 아닐까요? 그리고 저에게 이 세 단계 샤이론의 삶을 관통하는 공통의 이미지는 그들의 우수에 찬 눈이었고, 그래서 그 배경색은 '블랙'이 아니라 '블루'였습니다.
달빛 속에서는 흑인 아이들도 파랗게 보인단다.
In the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