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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Dec 21. 2018

타락한 미술 혹은 민주시민교육?

자끄 루이 다비드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자크 루이 다비드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화가 자끄 루이 다비드(1748~1825)는 이채로운 경력의 소유자였습니다. 처음에는 왕립

미술아카데미의 화가로서 루이 16세의 사랑을 받아 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프랑스 혁명기에는 열성적인 혁명의 전파자로서 자신의 군주였던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 왕비의 처형에 찬성하게 됩니다. 이후에는 프랑스혁명 당시 급진 정치세력이었던 자코뱅당의 일원이 되어 혁명이 대의를 선전하는 많은 작품들을 그립니다. 그러다 프랑스혁명의 기운이 쇠퇴하고 다시 왕정복고의 바람이 나폴레옹을 미화하는 그림을 그리는 황제의 궁정화가로서 변신을 거듭합니다. 프랑스혁명의 선전가로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다비드는 반혁명의 거두 나폴레옹의 왕정화가로의 배신에 가까운 변신, 타락에 가까운 변절을 함으로써 정치적 목적을 위한 타락한 예술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앞으로 몇 회에 걸쳐 다비드의 그림들을 통해 정치권력과 예술이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지, 최초의 민주시민교육 화가로서 다비드의 의미를 살펴보려 합니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4년, 425*320, 프랑스 파리 루브르 미술관


1784년 자끄 루이 다비드가 그린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미술사에 있어서 그를 신고전주의의 대가로 자리매김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그림입니다. 다비드에게 예술적 이상과 목표는 고대 로마시대의 역사에서 찾아낸 교훈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이었기에 고대 로마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그렸습니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도 기원전 7세기경 로마를 배경으로 합니다. 리비우스가 쓴 <로마건국사 1편>에 따르면, 당시 로마와 패권을 다투던 도시국가 알바는 당시의 관행에 따라 양 국가가 전면전을 벌이는 대신 각각 3명의 전사를 뽑아 결투를 벌이기로 합니다. 그래서 로마에서는 호라티우스 가문의 3형제가 대표로 선발되었고, 알바에서는 쿠리아티우스 가문의 3형제가 선수로 뽑혔습니다. 


그러나 호라티우스 가문의 딸인 카밀라는 쿠리아티우스 가문의 아들과 결혼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고, 쿠리아티우스 가문의 딸인 사비나는 이미 호라타우스 가문의 아들과 결혼한 상태라는 데 비극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림의 오른쪽 부분을 확대해 보면 비통해하는 세 여인의 모습이 보이는데,


이 중에서 두 아이를 부둥켜안고 비통해하는 여인이 바로 쿠리아티우스 가문에서 시집 온 사비나입니다. 흰 옷을 입고 슬픔에 잠긴 여인은 바로 쿠리아티우스 가문의 아들과 약혼한 카밀라인데 이들은 두 가문이 결투가 어떻게 끝나든 다가올 비극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에 따르면, 이 결투에서 호라티우스 가문의 첫째 형제만 살아 돌아와 로마의 승리로 끝나지만, 자신의 약혼자가 결투에서 죽은 것을 알고 카밀라는 절망과 비탄에 빠져 오빠에게 저주를 퍼붓자 호라티우스 가문의 장남은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에 매몰돼 국가적 대의를 보지 못하는 자신의 누이동생을 나무라며 처단합니다.


이 그림이 1785년 파리 살롱전에 출품되었을 때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이 그림은 원래 루이 16세의 명령에 의해 그려진 것이었고 국가를 위해 개인을 희생한다는 주제나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상적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형상화한 작품의 완성도 모두 국왕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아들에게 전장에 나가 싸울 칼을 내려주며 축복을 하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그림의 왼쪽과 오른쪽은 완벽한 대칭을 이룹니다.


꼿꼿하게 일자로 뻗은 세 아들의 팔과 위풍당당하게 벌린 다리는 슬픔에 빠져 비통해하는 오른쪽의 여인들과 대비되며, 이는 국가적 대의와 사사로운 개인사의 대비이며, 남과 여, 공과 사, 애국심 또는 시민적 미덕과 슬픔 또는 개인적 감상의 대립입니다. 이렇게 다비드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정치적 보수파나 진보세력 모두에게 모두 자신들에게 편리한 방식으로 해석되며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 작품의 의미는 누군가에게는 애국심의 고취로, 다른 누군가에는 희생과 헌신 같은 시민의식의 찬미로 읽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끄 루이 다비드는 그림을 통해 민주시민의 덕목을 교육하려 했던 최초의 민주시민교육 강사인 화가가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브루투스와 주검이 되어 돌아온 아들들>,1789년, 323*422, 파리 루브르 미술관

이 작품이 발표된 지 4년이 지나 1789년 드디어 프랑스혁명이 시작되고 루이 16세와 앙뜨와네트 왕비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다비드는 이후 <브루투스와 주검이 되어 돌아온 아들들, 1789년>, <테니스코트의 서약, 1791년>, <마라의 죽음, 1793년> 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일약 프랑스혁명의 예술적 선봉으로 우뚝 섭니다.

고대 로마의 이야기 속에서 교훈을 찾아 정치적 대의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찬미하고 혁명과 혁명가의 삶을 극화시킨 그의 작품은 프랑스혁명 시기 대중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 냅니다. 다비드 본인도 프랑스 혁명기에는 급진 자코뱅 당의 일원이 되어 혁명에 적극 가담했으나 당통, 마라,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에 시민들이 질려 버리고 반혁명과 반동의 기운이 강해지자 반혁명세력에 의해 혁명을 선전했다는 이유로 단죄되어 감옥에 투옥됩니다. 그리하여 자코뱅파에 의해 단두대에서 처단된 국왕 루이 16세나 반혁명 세력에 의해 처단된 마라나 로베스피에르처럼 다비드도 단두대에서 처형될 위기에 처했으나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한 그는 이후 혁명세력을 압살하고 공화국을 폐지하고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른 나폴레웅의 미화에 열을 올리는 모순적인 삶의 궤적을 보입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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