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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Dec 21. 2018

미술의 정치, 정치의 미술

자크 루이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부르투스와 주검이 된...>

1784년에 그린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로 대중들의 인기를 한 몸에 얻은 다비드는 1787년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발표합니다. 이 작품도 발표되자 평단의 엄청난 찬사와 대중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비드의 작품세계는 조금 더 정치적 지향성을 드러냅니다. 다비드 자신도 좀 더 혁명세력에 가담하여 급진적 정치세력인 자코뱅파의 일원이 됩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왕당파로부터는 그리 좋은 반응을 얻진 못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 130*195,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 그림은 아시다시피 청년들을 혹세무민 했다는 이유로 독배를 받고 죽게 되는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묘사하는 작품입니다. 제자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억울하게 죽게 되자 그를 탈옥시킬 계획을 준비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를 거부하고 당당히 독배를 마시고 죽음을 선택합니다. 작품 가운데 당당하게 앉아 왼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이가 소크라테스, 왼쪽 모퉁이에 고개를 떨구고 비탄에 잠겨있는 이가 그의 제자 플라톤입니다. 이 작품에서도 신고전주의의 대가답게 다비드는 절제된 배경과 단순한 구도의 대비를 통해 작품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냅니다. 인물들이 간혹 알몸으로 등장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 조각상의 미학적 이상을 묘사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발표된 후 2년이 지나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고 곧이어  바로 발표된 <부르투스와 주검이 되어 돌아온 아들들>은 그 시기와 내용에 있어서 그야말로 프랑스혁명을 위한 작품이었고, 다비드의 심화된 정치관이 그대로 투영된 작품이었었습니다. 

부르투스와 주검이 된 아들들,1789,323*422, 프랑스 파리 루부르 미술관

당시 급진적 혁명파인 자코뱅당의 일원이었던 다비드는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할 수 없었지만, 이사실을 알게 된 시민들은 거의 반강제적으로 이 작품을 전시장에 걸었고 심지어 이 작품을 돌아가며 지키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의 배경은 고대 로마의 공화정입니다. 자신이 선포한 공화정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아들들의 시신이 그림 왼쪽에서 들것에 실려 들어오고 이를 본 여인들을 정신을 잃습니다. 하지만 왼쪽의 부르투스는 자신의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키며 단호하게 앉아있습니다. 이것은 부르투스 자신은 감정보다는 이성적 판단을 중시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부르투스와 주검이 된 아들들>은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와 유사한 구도와 인물의 대비를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대의와 개인감정의 대비, 명암의 대비, 영웅주의의 찬미라는 주제의식에서도 두 작품은 유사합니다.  공화국의 대의를 위해 단호하게 아들들을 처형한 부르투스의 단호한 의지를 그린 이 작품은 시민적 헌신과 프랑스 혁명정신에 부합하는 것이었고 혁명을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혁명세력을 위한 찬사였습니다.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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