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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Jun 29. 2020

어떤 '사라짐'은  다른 사라짐을 통해 살아난다

카림 아이노우스 감독의 영화 <인비저블 라이프>를 보다  



두 여인이 조금 간격을 둔 채 함께 산에 오른다. 한 여인이 앞서 가는 여인의 이름을 계속 부르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는다. 멀리 건너편 산 봉우리에 어렴풋이 보이는 거대 예수상이 프레임 속에 잠깐 걸리면서 이곳이 브라질의 수도 리우 데 자네이루임을 알려준다.  순간 앞서 가던 여인은 사라진다. 영화의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것은 어떤 사라짐에 관한 서사임을 암시하면서.


운명이 떼어놓은 두 자매, 귀다와 에우리디스



'사라짐' 혹은 '망각'에 관한 영화


영화는 1950년대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를 배경으로 보수적의 구스망 집안의 두 딸 귀다와 에우리디스가 겪어야 했던 사랑과 상처를 그린다. 영화 첫 장면에서 먼저 산에 오르던 여인이 언니인 귀다(줄리아 스토클러)이고 언니 뒤를 따라 숨을 헐떡이며 올라가던 여인이 동생인 에우리디스(캐롤 두아르테)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먼저 산에 오르던 언니 귀다가 갑자기 사라졌듯이, 동생 에우리디스보다는 좀 적극적이고 자의식이 강하며 활달한 성격인 귀다는 그리스 항해사 요르고스와 사랑에 빠져 자신의 주체적 선택에 의해 구스망 가문에서 일순간 사라진다. 그 사라짐은 누군가에게는 욕망에 눈먼 '야반도주'일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겐 스스로 선택한 사랑을 찾아 나선 '사랑의 여행'일 수도 있는 사라짐이다.


사랑을 위한 사라짐의 선택


귀다의 첫 번째 '사라짐'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면 그녀의 두 번째 사라짐은 아버지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 자신이 선택한 사랑이 거짓으로 드러난 귀다가 임신한 몸으로 집에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말을 거역하고, 자기 욕망에 충실했던 딸이 '수치스럽다'며 매몰차게 쫓아낸다. 그래서 떠날 때도 뒷문으로 갔으니 이번에도 뒷문으로 가라며 아무도 모르게 사라질 것을 강요한다.


1950년대 브라질 - 어쩌면 오늘의 한국사회에도 일부분 해당되겠지만 -가부장적 위계질서 속에서, 여성은 종종 물리적으로 존재하기는 하지만, 자기 욕망을 추구하고 자발적인 선택과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기 삶의 주체로서의 존재 의미는 부정당하기 쉬웠다. 가부장인 아버지의 명령에 순순히 복종하는 존재, 언제 어디서나 남편의 욕구 충족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존재, 자신의 꿈은 포기하고 원치 않는 출산과 육아를 묵묵히 감내하는 존재로서 살면서 존재하기는 하나 존재 의미는 사라지고 망각되어 버린 존재로서 살아갈 것을 강요받아햐 했다.

구스망 가족의 두 자매 귀다나 에우리디스의 경우도 그렇게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존재 의미를 상실한 채 단지 존재하기만 해야 했다. 이 존재 망각이 삶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바로 자발적 '사라짐' 밖에는 없다. 그래서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 하는 에우리디스의 꿈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이  "왜 그렇게 나이 들어서도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 하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피아노를 칠 때만큼은 내가 사라지는 것 같아서."  

어떤 사라짐은 다른 사라짐을 통해 기억된다.    




가족의 의미에 관한 영화

이 영화는 애틋하고 슬픈 자매의 우애를 그린 영화이자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하는 영화다. 가족이라 해도 사랑이 없다면, 피만 나눈 가족이 오히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보다 가족 구성원에게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서로 공감하고 연대하는 이웃이 오히려 혈연보다 더 가까운 '가족'이 될 수 있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고 그 결정을 가족들에게 강요하는 가부장적이고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자매이기에 언니 귀다와 동생 에우리디스의 우애와 사랑은 얼마나 끈끈하고 깊은 것일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두 자매를 갈라놓는 일은 세상 무엇보다 가혹하고 잔인한 일일 수 있는데 바로 그 잔혹행위를 아버지가 두 자매에게 가한다. 그렇게 영화는 두 자매의 애틋한 사랑과 그리움을 다른 가족들의 철저한 거짓과 배신, 기만을 대비시켜 그린다.  


"피아노를 칠 때만큼은 내가 사라지는 것 같아서."  


그렇게 가장 가족의 사랑과 보살핌이 필요한 순간에 아버지의 강요와 이에 맞설 수 없었던 어머니의 무기력으로 인해 가족으로부터 처절하게 내쳐지고 구스망 '가족'으로부터 '사라짐'을 강요당한 미혼모 귀다의 삶은 이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그 고통스러운 싱글맘 귀다의 삶에서 유일한 희망은 사랑하는 동생, 유일하게 피와 사랑을 함께 나눈 에우리디스와의 재회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단지 피만 나눈 가족인 아버지의 거짓말과 어머니의 묵인으로 인해 평생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귀다와 에우리디스

아버지의 거짓말로 인해 동생 에우리디스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유학 간 줄로 믿고 있는 귀다는 에우리디스에게 보내는 수 십통의 편지를 엄마 앞으로 썼지만 그 편지는 단 한통도 제대로 배달되지 않았다. 사실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고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 했던 에우리디스는 그동안- 아마도 아버지의 결정과 선택에 순응해 원치 않은 결혼을 하고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며 귀다가 살고 있는 도시 리우데자네이루의 같은 하늘 아래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같은 도시, 같은 하늘 아래 가까이에 살고 있어도 자신이 선택한 '사라짐'에 대해 아버지가 내린 형벌, 강요된 '사라짐'을 치르는 귀다는 에우리디스를 평생 그리워할 뿐 다시 만날 수는 없었다.  영화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두 사람이 스쳐 지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관객들의 안타까움만 더할 뿐이다.




날 것 그대로의 여성 서사!

영화는 운명 속에 던져진 두 여인이 자신들의 존재 의미를 지우려는 운명 가혹함을 비록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 속에서 서로를 애타가 그리워하며 그 운명에 맞서 견뎌내고 살아가는 지를 보여주는 여성 서사다. 그리고 그 서사에는 솔직함 이외에는 그 어떤 미사여구나 불필요한 과장이 없다. 영화가 남녀의 육체적 관계나 출산 장면을 묘사할 때 보여주듯 남성적 로망의 표출이나 신비화는 찾아볼 수 없다.

비늘이 뜯긴 물고기처럼 세상에 던져진 귀다가 오랜 산통 끝에 요르고스의 아이를 병원에서 힘겹게 낳고 갓 태어난 아이 얼굴을 외면할 때, 피범벅이 된 채 자신의 아이를 버려두고 몰래 병원을 도망쳐 나온 귀도의 모습은 충격적이지만 사실적이다. 그래서 처철하게 슬프고 매혹적이다. 모성의 기적이나 출산의 신비, 임신의 기쁨이나 생명의 축복은 없다. 오직 날 것 그대로의 여성의 삶이 있을 뿐이다. 1950년대 브라질 여성들이 살아가야 했을 삶도 그렇게  거칠고 힘든 날 것 그대로였을 것이다. 2020년대 한국사회를 살고 있는 많은 여성들이 직면하고 있는 삶은 조금 다를까?




영화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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