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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Sep 07. 2020

너무 가까이,
희미하게 깜박거리는 이 사랑

에드워드 양 감독, 허우 샤오시엔 채금 주연의 영화 <타이페이 스토리>


배경은 80년대 대만이다. 대만 혹은 타이완이라면 내게는, 청나라 말기 삼민주의 혁명가 쑨원이 세운 원대한 중화민국의 꿈을 정치적 무능과 부패로 타락시킨 반공주의 군부정권의 나라. 반봉건, 반외세를 기치로 중국 전통사회를 뒤흔든 마오 쩌뚱과 농민군의 신민주주의 혁명과 이를 위한 대장정의 기세에 눌려 도망치듯 대륙을 떠났던 쟝제스의 후손들이 급조한 나라. 사회혁명의 공포와 흡수통일의 불안 속에서 국가 정체를 위해 개인적 자유를 희생하며 살아가는 섬나라로 기억된다. 이 영화의 시선에는 이런 타이완의 모호한 정체성과 정치적 불안이 필터처럼 끼워져 있는 지도 모른다. 


에드워드 양 감독의 <타이페이 스토리>는 오랜 시간 함께 지냈으나 정작 함께 나눈 것은 거의 없는 두 남녀의 희미하게 흔들리는 사랑을 그린다. 그 사랑은 그들이 숱하게 만나고 헤어지고 마침내 쓸쓸히 혼자 돌아서야 했던 그 어두운 골목을 잠깐 잠간 비추는 자동차 불빛처럼 다가왔다 마음의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실제 세상의 거리에는 그 자동차가 내뿜는 매연만큼이나 많은 경적과 소란이 있겠지만 이미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이미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 두 사람의 마음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슈첸과 아룽 두 사람의, 이미 식어버린 사랑은 거리의 자동차 불빛처럼 아주 가까이서 흔들리며 깜박거리다 사라져 간다. 

슈첸과 아룽


오랜 시간 함께 했다고 많은 것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너무 오랜 시간을 함께 했기에 이 사랑은 더 이상 불가능해졌을 지도 모른다.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고 해서 많은 것을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모습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영화 속 두 주인공 '슈첸'과 '아룽'은 상당히 오랜기간 서로를 알아왔고, 그 사랑은 그래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진행되었다. 그 사랑의 시작이 명확하지 않았듯이 그 사랑의 끝도 정확하게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수 없다. 다만 그 끝이 어렴풋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뿐이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먼 거리를 느낀다. 가장 가까이에 살고 있고, 함께 있지만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사랑을 그린다. 각자에게 이미 사랑하는 다른 사람이 있는 것처럼 서로가 원하는 사랑과 서로가 꿈꾸는 사랑은 이미 다르다. 그리하여 서로가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멀리 있음을 안다. 그 거리는 물리적으로는 손 한뼘도 되지 않을 거리지만 서로에게 와 닿지 않는 마음의 간격은 우주의 다른 은하만큼이나 멀다. 가장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이 외로움은 그래서 더욱 견디기 힘들다. 세상은 아무리 많은 소음으로 가득차 있고, 거리에 북적이는 사람들도 넘쳐나도 내 귀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고, 내 속엔 그 누구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가장 밝은 곳에서 자신의 모습은 가장 드러나지 않는다. 슈첸은 밝은 곳에서 오히려 자신의 모습을 볼수가 없다. 그림자와 어둠이, 배경과 전경을 뭉게버린 그 모호한 공간 속에 자신이 존재하는 기분이다. 그래서 결정하기도 힘들다. 자신의 감정도 그렇게 모호하고 불안하게 흔들린다.





너의 시간은 과거로 흐르고 나의 시간은 미래로 나아간다. 아룽의 시간은 전성기를 지났다. 대만야구의 황금기가 지났듯이. 더 이상은 이룰수 없은 꿈을 버리고 생계를 위해 방직에 나섰지만 되는 일은 없다. 그래서 늘 시선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있다. 그 꿈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사랑도 지금 여기 혹은 미래가 아니라 도쿄 혹은 과거에 있다. 


그렇게 슈첸과 아룽은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었고 같은 공간, 같은 시간 속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무너져 내린다. 다만 그 무너짐을 인정하고 결정하기를 두려워 할뿐이다.




어느 것이 배경이고 어느 것이 전경인지 구분이 없다. 빛과 어둠이 뒤섞이듯, 인물이 배경 속에 묻혀버리듯 . 우리의 사랑은 모든 것이 모호하다. 그래서 슈첸은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아룽에게 이렇게 말한다.



넌 사람을 동정할 뿐, 사랑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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