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9일 실시 _제19대 대통령선거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되고 5월 9일 제19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지게 됩니다. 우리 역사상 전임 대통령이 궐위가 된 경우는 모두 3차례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가 1960년 제2공화국 시절 윤보선 대통령, 두 번째는 1979년 최규하 대통령,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1980년 전두환 대통령 때입니다. 그러나 이전의 사례는 모두 대통령 간선제 하에서 발생한 것이었고 따라서 '궐위로 인한 대통령 선거'의 의미나 파장이 크지 않았습니다.
벚꽃 대선 혹은 장미 대선
윤보선 대통령은 1960년 4월 19일 시민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미국으로 망명한 상태에서 대통령에 취임했는데 당시 제2공화국은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어서 실질적 권력은 장면 총리에게 부여되어 있었고 대통령은 국회에 의한 간선제여서 그 역할과 비중이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은 1979년 이른바 <10.26 사태>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함으로써 당시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다가 12월 6일 통일주체 국민회의에 의해 역시 간선제로 제10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즉시 임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12.12. 군사쿠데타>가 발생하고 실권은 전두환 등 신구부 세력에 넘어간 상황에서 국정운영 능력을 상실한 최규하 대통령은 마침내 1980년 8월 16일 형식적인 대통령직마저 내려놓게 됩니다. 이후 일시적으로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가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다가 1980년 8월 27일 치러진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제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입니다.
이전의 대통령 궐위선거와 달리 제19대 대통령선거는 87년 민주화 이후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 하에서 처음 발생한 궐위선거였습니다.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 궐위로 인한 선거는 궐위사유가 발생한 3월 10일부터 60일 이내에 실시하도록 규정되어 있기에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5월 9일을 선거일로 결정해 3월 15일 공고합니다. 이로써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라는 헌정사상 유래 없는 사건이 없었더라면 예정대로 2017년 12월 20일에 치러질 예정이던 제19대 대통령선거는 7개월 정도 앞당겨 실시되게 됩니다. 그리하여 4월에 하는 '벚꽃 대선'이 아니라 5월에 하는 '장미 대선'으로 불리게 됩니다. 참고로 2022년 치러지는 제20대 대통령 선거는 2022년 3월 9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변은 없다
2017년 5월 9일 실시된 제19대 대통령선거 결과는 예상을 크게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심판과 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로 집권 세력과 여당인 새누리당에 대한 국민적 분노와 실망이 극에 달한 상태였고 따라서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압승이 일찌감치 예견되었습니다. 일부 야당 지지자들은 이런 예단과 낙관 속에서 '어대문'(어차피 대통령은 문재인)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한 때 새누리당의 당명을 자유한국당으로 바꾸며 일부 지지 세력을 결집시키는 데 성공한 홍준표 후보와 민주당 경선 직후 이탈한 반문재인 세력의 지지를 흡수하며 지지율 1위 후보에까지 오른 국민의 당 안철수 후보의 맹추격으로 문재인 후보의 입지가 다소 흔들리는 듯했지만 선거 결과 이변은 없었습니다.
선거 결과 1위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득표율이 41.07%, 2위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 24.05%, 3위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 21.42%로 문재인 후보가 2위 홍준표 후보를 득표율 17.1% 차이로 , 표차 5,570,951표로 따돌리고 제19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이번 선거에서 1위와 2위의 표 차이 550만여 표는 우리나라 선거 역사상 역대 최다 표 차이로 기록됩니다. 투표율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국정농단 사태, 탄핵심판을 이끌어 낸 촛불시위 등으로 고양된 정치적 열기를 반영하여 젊은 층의 투표율이 높을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실제로도 최종 투표율은 77.2%로 아쉽게 80%는 넘지 못했지만 87년 민주화 이후 네 번째로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지난 18대 대선의 75.8%보다 1.4% 더 높은 것이었습니다. 대통령선거에서는 처음 적용된 사전투표의 투표율이 애초 26.6%로 사상 최대로 높게 나오자 최종 투표율도 처음에는 80%를 쉽게 넘길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선거일이 5월 9일로 정해지면서 사전투표일에 미리 투표를 하고 본 투표일에는 여행을 떠나는 등 사전투표가 유권자의 투표일을 분산시키는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나면서 최종 투표율은 80%를 넘기지 못했지만 그래도 87년 민주화 이후 20여만에 최고 투표율을 기록했음은 주목할 만한 사실입니다.
역사는 반복되지만
종종, 19대 대선은 17대 대선의 역전된 모습이라 말해지는데 이는 17대 대선의 상황을 뒤집어 놓고 보면 19대 대선국면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정치는 진보와 보수 정권이 10년을 주기로 교체되는 패턴을 보여줍니다. 87년 대선 이후 노태우-김영삼의 보수 정권 10년, IMF 외환위기에서 정권 교체에 성공한 김대중-노무현의 진보정권 10년, 그리고 이명박-박근혜의 보수정권 10년이 그것입니다. 이는 유권자들이 10년이면 해당 정권에 대한 정치적 평가를 내리기에 충분한 시간이고 정권교체에 대한 일반적 기대가 높아지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역사는 반복되지만 이번에는 진보 진영과 보수진영의 입장이 뒤바뀐 채 거꾸로 반복됩니다. 2007년 제17대 대선 직전에 정부 여당의 잇단 실정으로 여당 지지율이 폭락하고 제1야당 후보의 대세론이 견고했던 것처럼 19대 대선 직전 보수진영은 대통령 탄핵에 대한 입장 차이에 따라 분열되어 지지율이 급락했고 반대급부로 제1야당인 더불어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의 지지도는 급상승하고 대통령선거 본선보다 민주당 대통령선거 후보자 선출을 위한 경선이 더 치열한 일종의 '양궁 국가대표 선발전'으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직전 18대 대선에 출마해 근소한 차이로 패배한 문재인 후보는 따라서 18대 대선에서 어느 후보자보다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 제3후보라 할 수 있는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는 이번에는 보다 보수적 색채를 드러내며 진보진영의 표보다는 보수진영의 표를 잠식하고 있던 점도 문재인 후보에게 유리한 측면이었습니다.
선거 초반 범여권의 유력 주자로 꼽히던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이 검증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낙마했고, 보수진영의 거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황교안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마저 불출마를 선언했고, 극우 보수적 막말과 성차별적 이성관, 소수자에 대한 비관용적 태도 등으로 홍준표 후보의 중도 확장력에 명백한 한계가 노출되며 보수 진영은 뚜렷한 국면전환의 계기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더해 안철수 후보의 폭발력은 지난 선거에 비해 눈에 띄게 약화되었고, 나름 합리적 보수의 기치를 내걸고 출마한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도 지역구도의 한계와 안보이슈에서 지나친 보수성으로 인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에 맞설 유력 경쟁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때 2007년 UN 북한 인권결의안 기권 논란과 자녀 취업 특혜 논란 등으로 지지율이 잠깐 흔들리기는 했지만 견고한 문재인 대세론을 꺾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예상대로 결국 압도적 표 차이로 문재인 후보가 승리합니다.
선거 이모저모
19대 대선과 관련해 재미있는 현상은 후보자의 기호 순서와 후보자별 득표율 순위가 같다는 것입니다. 즉 1번후보부터 5번후보의 기호순서와 득표률 순위가 같다는 것입니다. 19대 대선에 출마한 최종 후보자는 기존 기록 12명을 깬 15명으로 역대 최다였습니다. 후보자는 사상 최대였지만 여성 후보자는 정의당의 심상정 후보 단 한 명뿐이었습니다. 15명의 후보자가 후보로 등록됨에 따라 19대 대선의 투표용지도 역대 대통령 선거 사상 가장 긴 28.5cm가 되었습니다. 선거 막판 2명의 후보자가 사퇴하긴 했지만 이미 투표용지가 인쇄된 이후라 투표용지에 그들의 이름은 그대로 남았고 '사퇴'라고만 표시되었습니다.
투표용지와 관련하여 19대 대선에서 두 종류의 투표용지가 사용되었다는 논란이 제기되었고, 이와 관련된 허위사실과 거짓 선동, 가짜 뉴스가 급속히 전파되어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20대 총선부터 무효표를 방지하기 위해 후보자와 후보자 사이에 간격을 두는 투표용지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일부 유권자들이 자신이 받은 표는 간격이 붙어있는 투표용지였다는 주장을 제기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번 대선에서 2 종류의 투표용지가 사용되었고, 간격이 붙어있는 투표용지로 투표한 사람의 표는 무효표가 된다는 가짜 뉴스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논란은 사전투표 이후부터 제기되기 시작했으나 우리 선거법상으로는 투표지를 촬영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진위여부를 확인할 수 없어 의혹은 증폭되었습니다. 부분별한 허위사실과 가짜 뉴스가 급속히 전파되어 나가자 이에 선관위 측에서는 이러한 가짜 뉴스 유포에 대한 엄정한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결과적으로 확인된 바, 선거가 끝나고 전국의 1만여 개 개표장에서 간격이 붙은 '기형 투표지'는 단 한 장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 이중 투표용지 관련된 '소동은' 우리의 기억력이 얼마나 불완전하며, 우리는 가짜 뉴스에 얼마나 쉽게 현혹되는 지를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거 벽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보통 후보자들의 선거벽보는 본인 사진만을 실어야 하고, 모든 후보자들의 규격이 다 동일해야 하는 등 형식상의 제약이 많기 때문에 후보자에 따라 크게 차이를 나타내지 못하고 대부분 비슷비슷한 모양새를 띕니다. 그런데 안철수 후보자의 선거벽보를 보며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다른 후보자와 달리 얼굴이 잘 나오는 프로필 사진이 아니라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있는 모습의 상반신 사진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독창적인 선거벽보 덕분에 안철수 후보의 선거벽보는 다른 후보자의 선거벽보에 비해 유독 많이 훼손되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사람 손에 의해서 훼손된 것이 아니라 바로 고양이에 의해서. 왜냐하면 밤길을 쏘다니는 길냥이들이 양손을 번쩍 치켜든 선거벽보 속 안철수 후보가 자신들을 공격하려는 것으로 오인해 유독 안철수 후보의 선거벽보를 많이 훼손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광장의 정치에서, 민주주의 제도로!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과 그로 인한 대통령 탄핵이라는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를 겪고 조기에 치러진 2017년 제19대 대선은 선거를 통한 반복적인 정권교체에 성공하면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수준을 더욱 높여주었습니다. 거리로 분출되었던 촛불 시민들의 정치적 열망과 기대를 다시 선거제도와 민주주의 절차 속에 담아내면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성숙성과 선거제도의 안정성을 확인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제19대 대선을 성공적으로 치러내면서 과거 민주화 이전 시절에는 정치적 격변과 권력의 진공 상태에서 종종 그랬던 것과는 달리 하마터면 위기에 빠질 수 있었던 민주주의 제도와 선거제도를 성숙한 시민의식과 정치적 실천으로 지켜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