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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Dec 26. 2018

황제를 위하여

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 <나폴레옹 대관식>

1804년 12월 나폴레옹의 궁정화가에 임명된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기념하는 작품을 그리라는 명을 받습니다. 거의 10미터에 이르는 엄청난 크기의 캔버스에 그려진 <나폴레옹의 대관식>은 원래는 4점을 그릴 계획이었으나 실제로는 2점만 그려집니다. 하나는 1805년에, 다른 하나는 1822년에. 엄청난 크기의 대작이었던 만큼 제작 시간도 많이 소요되었고 그 사이 정치적 변화도 발생해 나폴레옹은 엘바섬으로 유배되기에 이릅니다. 다비드 본인도 벨기에로 망명하게 되고 결국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다비드의 시신은 사후에도 국왕의 시해에 가담한 자의 시신을 국내로 들여올 수 없다는 왕당파의 반발로 끝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805년에 그려진 <대관식>과 1822년에 그려진 <대관식>은 재미난 차이점이 있습니다. 

나폴레옹 대관식, 1805~1807, 프랑스 파리 루브르 미술관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은 파리의 노틀 담 성당에서 거행되었습니다. 1805년에 그리기 시작한 <대관식>에는 총 204명의 실재 인물이 등장합니다. 먼저 그림 중앙에서 로마 황제처럼 월계관을 쓴 나폴레옹이 황후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어주고 있고 나폴레옹 뒤에 앉은 교황 비오 7세는 손을 뻗어 이를 축복합니다. 실제 대관식에서는 당시 몰락해 가는 교회권력을 대표하는 교황은 자신이 나폴레옹에게 직접 왕관을 하사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고 싶어 했으나 당혹스럽게도 나폴레옹이 직접 왕관을 집어 들어 자신의 머리에 얹음으로써 교회보다 우위에 있는 황제의 권력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다비드는 교황 비오 7세가 성부, 성자, 성신을 상징하는 오른손 손가락 3개를 펴서 나폴레옹을 축복하는 모습을 그려 교황 권력과 황제 권력 간의 갈등을 감추었습니다.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어주는 나폴레옹과 이를 축복하는 교황 비오7세

또한, 나폴레옹보다 6살 위였고 이미 아이가 둘이나 있었던  과부 조세핀이 마음에 들지 않아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던 모후 레티치아도 그림 속에 온화한 웃음을 머금은 인자한 모습으로 그려넣음으로써 다비드는 고부갈등도 보기 좋게 감추어 버렸습니다. 조세핀은 대관식 당시 이미 40이 지난 나이였지만 그림 속에서는 미모의 젊은 여성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고객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한 다비드의 재간이 빛을 발하는 부분입니다. 또 재미난 사실은 레티치아가 앉아있는 자리 위쪽에서 노트를 들고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는 검정 양복의 남자는 바로 다비드 자신입니다.

나폴레옹 대관식, 좌: 1805년과 우: 1822년 부분

그림 속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로는 나폴레옹의 형제들로 나중에 나폴리 왕의 자리에 오르는 형 조제프와 네덜란드의 왕이 되는 루이가 가장 왼쪽에 등장합니다. 그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다섯 명의 여자들은 왼쪽부터 나폴레옹의 누이 캐롤린, 폴린, 엘리자와 동생 루이의 아내 오르탕스, 형 조제프의 아내 줄리입니다. 줄리의 손을 잡고 있는 사내아이는 조세핀의 아들 샤를입니다. 

나폴레옹 대관식, 1822년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

앞에서 언급했듯이 다비드는 1922년에 대관식 장면을 다시 한번 더 그립니다. 다비드의 대관식 그림을 보고 매우 흡족했던 나폴레옹이 대관식 그림을 하나 더 그릴 것을 명령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비드가 두 번째 대관식 그림을 그리던 도중 나폴레옹은 실각하여 엘바섬에 유배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비드는 두 번째 그림을 나폴레옹의 간섭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롭게 그릴 수 있게 됩니다. 첫 번째 그림은 현재 루브르 미술관에 두 번째 그림은 베르사유 궁전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그려진 <나폴레옹 대관식>에서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누이 폴린의 드레스를 첫 번째 그림과 다르게 분홍빛으로 채색합니다. 이는 첫 번째 그림과 구별하기 위해 그랬다는 설과 폴린을 흠모하던 다비드가 나폴레옹이 권력을 잃자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두 번째 그림에서는 드러낼 수 있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서재에 있는 나폴레옹, 1812년과 자크 루이 다비드의 자화상

자크 루이 다비드의 초기작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부터 <나폴레옹 대관식>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변화에 따른 다비드의 정치적 변신과 작품세계의 변화 혹은 예술적 변신을 살펴보았습니다.  다비드의 작품세계에서 무엇보다 불변하는 요소는 예술적 원형과 미적 숭고함을 그리스 로마 시대의 예술에서 찾는 경향, 색과 구도의 단순한 대비를 통한 주제의 부각, 영웅주의에 대한 찬사, 가부장적 국가주의의 경향일 것입니다. 


다비드의 작품세계에는 지금의 기준으로 본다면 매우 불편할 수도 있는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 요소들이 단지 '전형적인 가부장주의의 선전물'이라거나, '영웅주의를 미화하기 위한 미술의 타락'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비드가 자신의 작품 속에서 그림으로써 보여준 것과 그리지 않음으로 보여준 것, 또 다비드가 작품 속에 감춤으로써 보여주지 못한 것과 드러냄으로써 감출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떤 것인지 곰곰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비드 자신만의 개인적인 한계인지 아니면 미술 혹은 예술이 근원적으로 갖고 있는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한계는 아닌지 곱씹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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