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 정은채 이선균 주연의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반복과 순환 일색인 홍상수의 영화는 무척이나 지루할 수 있는데
왜 나는 그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자꾸 웃음이 나는 걸까?
일상 속에서 아주 쉽게 마주칠 듯한 장면들과 특별한 효과도 자극적인 스토리도 없는 그의 영화.
그런데 홍상수의 영화 속에서는 어쩌면
홍상수가 보여주고 싶어 하는,
우리가 흔히 놓치는 아니, 우리가 은폐하고 싶은,
우리 삶의, 사랑의, 일상의 진실된 모습들이 종종 너무 뚜렷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영화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어쩌면 이런 것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들,
혹은 상대방이 드러내 보이는 것들, 상대방이 하는 말들을
얼마나 쉽게 진실이라 믿는지,
아니 믿고 싶어 하는지......
진실은 사실, 은폐되어 드러나 있지 않았거나,
그 너머에 있거나,
우리가 감추고 싶어 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홍상수 그의 영화에서는 꿈과 현실이 잘 구분이 안되듯
현실에서는 우리가 진실로 믿고 싶어 하는 것과
우리가 믿어서 진실이 된 것들이 잘 구분이 안된다는 것.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진실된(?) 인물인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그녀의 이름을 거꾸로 읽으면 ‘원해’인데)
유부남인 대학 교수를 진실로 사랑하고,
그래서 ‘미쳤으며’,
힘들어하고, 자신을 악마라 규정하고,
힘들어서 못 견디겠기에 아무한테나 술을 청한다.
(홍상수 영화에 등장하는 무수한 불륜과 외도의 코드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 할 수도 있는데. 나는 그가 이런 설정을 통해 우리 시대의 진실한 사랑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위태로우며, 가냘플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의도적인 설정이라고 본다. 물론 혹자는 감독 자신의 경험을 용기 내어 고백하는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해원을 ‘이쁘고, 다른 애들과 달라서’ 사랑하는 이교수는
그 진실이 드러나는 일이 너무나 불편하고 힘든 일이다,.
"애가 있고 직장은 다녀야" 해서......
그래서 그 사랑의 진실이 드러나는 걸 두려워하고,,
남의 시선과 학생들의 말을 의식할 수밖에 없으며,
숱한 가식적인 말과 우연을 가장하여 그 ‘진실’이 드러나는 걸 은폐한다.
같은 과의 친구들은 해원이 이국적으로 보이기에 혼혈이라 믿으며,
"그녀의 엄마가 그녀를 포르셰로 학교에 태워준다는 말이 돌기에"
그녀를 부유하다고 여기며, 그것이 그녀에 관한 '진실'일 것이라 믿는다.
심지어 해원이 믿음을 준 친한 언니(예지원)와 같은 과 친구 유람이조차도
그녀의 내밀한 진실-이교수와의 부적절한 관계-을 지켜주지 않는다.
친한 언니는 자신 역시 유부남과 부적절한 관계를 7년째
불안하게 이어나가면서도 해원을 비난하는 일에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진실이 잘 드러나지도 않고,
진실이 잘 지켜지지도 않는
모두들 각자 자신들이 보는 것,
자신들에게 보이는 것만을 진실이라 믿고, 또 믿고 싶어 하는,
또 그것이 진실이라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우리의 이런 일상 속에서는
해원에게는 ‘자신이 너무 드러나기에’,
‘자신이 원하는 만큼 돈을 주고 헌책을 사는 일'이 두렵고,
카페에 놓인 노트에 ‘자신의 생각을 적어 모르는 사람에게 전하는 일’이 싫다.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교수를 한다는 홍상수 감독의 분신 같은 중원도 똑같은 생각이다.
(감독의 의중이 실린 핵심 메시지일 듯)
우리 삶과 사회에 대한 수많은 편견과 단편적인 인식들이,
“대학교수면 안정적이고, 방학 중에 일 안 해도 돈 나오는 좋은 직업"이라는
영화 속에서 유준상이 힘주어 말하는 그런 류의 고정관념이,
한 줄로 정리된 우리 삶과 서로에 대한 이미지들이,
진실의 자리를 대신하고,
숱한 술자리나 일상의 담화를 통해 증폭되어 가는
이 시대에 누구의 딸도 아닌 우리들 자신의 모습인 ‘해원’은
‘조그만 기다리면 다 괜찮아질 거예요.’ 라며 자신 없는 자기 위로를 되뇌며,
이 삶이 꿈인지 현실인지 잘 구분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 거 아닐까?
"비밀은 없어요. 다 알게 돼요!"라고 가끔 울먹이며...
'아르테이아(arteia)'. 하이데거에게 진실이란 '은폐되어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일'이었다.
숲 속을 비추는 한줄기 햇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