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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Jun 09. 2021

공무원들은 왜 아직도
'궁서체' 편지를 쓸까?


아침에 출근해서 업무 메일을 열었더니 최근 결혼한 동료직원의 '감사의 마음'이 와 있다. 어김없이 '궁서체' 폰트를 이용한 너무나도 정중하고 진지하고 예의 바른 감사 편지다. "어려운 시국에도 귀중한 시간 내주셔서"로 시작하고 "고마운 마음을 깊이 간직하고 서로 아끼며 행복하게 살겠다"는 다짐으로 끝나는. 


공직에 들어온 뒤 내가 새로 알게 된 재미난 사실 중 하나는 공무원들은 감사의 마음을 전할 때 주로 '궁서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공무원은 문서로  말한다"는 말이 있듯이 공무원의 업무는 주로 공문을 작성하고 공문으로 소통하는 일이 잦다.  내가 근무하는 기관의 경우, 업무가 폭증하는 선거 때는 하루에 많게는 2~30 통의 문서를 혼자서 작성하기도 한다. 이런 공문에 주로 사용되는 폰트는 공문서 작성 프로그램의 기본 서체인 휴먼명조체나 굴림체, 바탕체 정도다. 공문서 작성의 주목적이 내용 전달이기에 서체의 아름다움이나 디자인적인 요소는 폰트 선택의 중요 기준이 아니다. 요즘에는 그래도 폰트 선택의 자율성이 대폭(?) 커졌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문서에 '맑은고딕'이 나 '나눔명조' 같은 ‘전형적’이지 않은 서체를 사용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상급자도 많이 있었다. 문서의 내용보다는 형식에 과도한 집착을 보이며 “공문서는 뭐니 뭐니 해도 '휴먼명조체'로 작성해야 깔끔해 보인다”며.


그런데, 연말연시나 선거가 끝난 직후 우리 기관의 수장인 사무총장님이 전 직원들에게 보내는 감사편지는 꼭 '궁서체'로 온다. 뿐만 아니라 직원들끼리도 이 메일을 주고받을 때에도 평소에는 그러지 않다가도 무언가 정중한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하는 '결정적 순간'에는 꼭 '궁서체' 메일을 보내온다. 예를 들어 경조사를 치른 직원이 축의금이나 부의금을 보낸 직원들에게 보내는 '답례 편지'나 상급기관의 간부님들이 국, 과장님에게 보내는 '업무 연락'이나 '지도 서한'은 꼭 '궁서체'이다. 최대한의 예를 갖추기 위해서는 반드시 '궁서체' 편지를 보내야 한다고 약속이나 한 듯이 말이다.  사회생활을 할 때에는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이 '궁서체' 편지의 정체가 나는 몹시 궁금해졌다.  



'궁서체' (宮書體) 혹은 '궁체'(宮體)는 사실 '궁중 서체'의 줄임말이다. 말 그대로 원래 궁녀들이 궁에서 쓰던 한글 붓글씨 서체를 지칭했다. 조선 중기 이후 한글이 보급되면서 궁중에서 궁녀들이 서한 작성이나 소설 필사 등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붓으로 글씨를 쓰면 자연스레 생기는 삐침을 '부리' 혹은 '세리프'(serif)라고 하는데 이 삐침이 없으면 "~이 없다"는 뜻의 불어 접두사 san을 붙여 '산세리프(san-serif)' 서체라 한다. 세리프 서체가 산세리프 서체에 비해 보통 더 아름답고 단정하고 진지한 느낌을 준다. 바로 세리프 서체의 대표주자가 명조체, 궁서체, 바탕체이고, 고딕체, 굴림체, 돋움체 등이 산세리프 서체이다. 해서 공공기관이나 학교에서 과거에 붓글씨로 쓰던 졸업장이나 상장이나 임명장에 주로 궁서체를 사용한다. 또 공직자들이나 공공기관의 직원들 간의 연하장이나 청첩장 등 정중하고 진지한 서한도 과거에는 붓글씨로 직접 쓰는 일이 많았기에 컴퓨터로 문서나 메일을 작성하는 요즘에도 이런 문서에는 '궁서체'를 주로 사용하는 듯하다.  

궁서체는 대표적인 '세리프' 서체다


"나 지금 진지하다, 궁서체다"

궁서체는 붓글씨에 유래했기 때문에 분위기가 너무 엄숙하고 무겁고 진지한 느낌을 준다. 이제는 '너무 진지해' 보이거나 '촌스러워' 보여 시각디자인 학과 대학생들이 이 서체를 사용해 과제를 제출하면 낙제점을 받기 십상이라고 한다. 심지어 요즘은 공포 분위기와 허무함을 나타내기 위해 방송 프로그램에서 이 궁서체를 사용하기도 하고 너무 튀는 궁서체의 시각효과를 대놓고 활용한 방송자막이나 광고물도 간혹 등장한다. 주로 한의약품 광고에 많이 쓰이고 민족사관학교와 프랑스의 세균학자 이름으로 유명한 어느 우유회사 광고가 있다. 게다가 북한 매체들이 즐겨 사용하는 자막이 바로 이 궁서체를 닮아 있어 비장감을 더해준다. 그러나 북한 매체가 사용하는 서체는 궁서체가 아니라 '옥류체'다. 이렇듯 이제는  개인들의 편지글에서는 절대 등장하지 않고 현실 사회에서는 오히려 비현실성을 부각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되는  이 진지함의 대명사 '궁서체'가 왜 공직사회에서는 여전히 살아남은 것일까?    


진지함의 대명사 궁서체


아직도 공직사회 일각에서 ‘궁서체‘를 애용(?)하는 이유는 아마도 과거에 붓으로 한 획 한 획 정성과 공을 들여 편지를 쓰던 진심을 전하기 위함일 것이다. 실제로 인사혁신처에는 국새가 찍힌 대통령의 명의의 임명장을 직접 붓으로 쓰는 담당 공무원들도 있다. 이분들의 업무는 대통령 명의로 수여할, 사무관부터 국무총리까지 5급 이상 국가직 공무원들의 임명장을 붓글씨로 작성하는 것이다. 여기에 사용되는 서체도 바로 반흘림 '궁체'다. 한 장 쓰는 데 대략 15분이 걸리는 대통령 임명장을 담당자 두 명이서 1년에 7000∼8000장 정도 작성한다고 한다.  한 명이 하루 평균 15장을 쓰는 셈이다. 우리 기관에서도 직접 붓으로 쓴 것은 아니고 컴퓨터로 인쇄하는 것이지만, 직원들 임용장이나 임명장, 각종 표창, 그리고 공직선거 후보자들의 당선증도 모두 궁서체로 작성한다. 

 

다양한 폰트의 세계, Photo by Brett Jordan on Unsplash


사실 우리가 '폰트'라고 불리는 서체를 컴퓨터에서도 그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건 다름 아닌 혁신과 창의성의 대명사이자 스마트폰의 '창조주'인 애플 컴퓨터의 스티브 잡스(Steve Jobs, 1955~2011) 덕분이다. 컴퓨터 폰트를 만든 사람도 바로 잡스이기 때문이다. 잡스는 캘리그래피(calligraphy) 강의로 유명한 리드 칼리지를 중퇴했다. 잡스가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인 매킨토시를 만들 당시 컴퓨터에 사용되는 폰트는 기계어 같은 한 가지 폰트 밖에 없었다. 잡스는 대학 때 들었던 캘리그래피 수업을 떠올리며  매킨토시 컴퓨터에서 사용할 주요 폰트들을 디지털화했다. "기술은 유용할 뿐만 아니라 아름다워야 한다"는 신념을 지녔던 잡스는 디지털 폰트를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폰트를 디자인했다. 그렇게 해서 매킨토시는 역사상 처음으로 아름다운 폰트를 가진 컴퓨터가 되었다. 그러나 잡스의 위대한 점은 그가 최초로 디지털 폰트를 만들었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컴퓨터에서 폰트를 선택하고, 수정하고, 변경하고, 조정할 수 있는 '자유'를 제공했다는 점이 아닐까? 사용자가 서체를 자유롭게 선택하고 창의적으로 변형하고 통제할 수 힘을 부여받은 것은 아날로그 방식의 인쇄술과 타자기 시대에는 쉽게 할 수 없던 일이었던 것이다. 이점이 바로 잡스의 위대함이고 놀라움이다.  


"기술은 유용할 뿐만 아니라 아름다워야 한다"


전통과 관행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 뒤에 숨은 진심의 뜻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되살리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자신이 선택하는 서체의 의미에 대한 단 한 번의 고민도 없이, 단지 오래 반복된 관행이라는 이유로 관행을 반복하기만 하는 것도 결코 아름다운 모습이 될 순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스티브 잡스가 무엇보다 중요시했던 개인의 창의성과 자발성, 선택의 자유와 같은 가치가 관행만 반복하는 조직문화 속에서 존중받지 못했다면 애플의 성공도 스마트폰의 혁명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 공직사회도 이런 다양한 가치와 관행의 존중 사이에서 좀 더 균형 있는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어김없이 '궁서체'로 반복되는 동료 직원과 총장님의 서한문을 읽으며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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