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로 의원내각제 정치제도를 도입했던 제2공화국은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이 이끈 군부 구테타에 의해 출범 9개뭘 만에 붕괴합니다. 의회를 해산시킨 군부는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비상기구를 설치하여 권력을 장악하여 군정을 실시했습니다. 군부는 군정을 지속하고 싶었지만 쿠테타를 용인하되 민정이양을 약속하라는 미국의 압박과 4.19 민주혁명으로 고양된 국민들의 민주의식은 군부세력에게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결국 군부는 1961년 8월에 1963년 여름에 군정을 끝내겠다는 민정이양 약속을 발표합니다. 그러나 1963년 초에도 군부는 군정을 4년 연장하겠다고 발표하는 등 군정 지속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5.16 군사쿠테타 당시 거리에서 경계 중인 군인들
미국의 강력한 반발에 결국 민정이양을 서두르게 된 군부는 <정치활동정화법> 등을 발표해 이승만, 장면 등 보수정치인을 비롯한 주요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막고 자신들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총지휘하여 민주공화당 창당작업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주요 정치세력의 정치활동은 금지시켜놓고 민정이양 후 자신들의 정치활동의 핵심 근거지가 될 정당창당 작업을 정보기관을 동원해서 서둘렀던 것입니다.
제5대 대선 선거벽보를 보는 시민들
1962년 12월 17일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국민투표로 헌법을 개정하여, 정부형태는 다시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제도 변경했습니다. 다만 부통령제는 이제 폐지했습니다. 대통령선거도 다시 직선제로 변경되었습니다.
1963년 10월 15일 실시된 제5대 대통령선거 당시 우리나라 총 인구수는 26,278,025명 이었고 선거인수는 12,985,015명, 투표자수는 11,036,175 명으로 투표율은 85%를 기록했습니다.
투표소 현장
이 선거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창설된 후 최초의 선거였는데 선거권은 만 20세 이상의 국민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대통령선거 피선거권은 선거일까지 계속하여 5년 이상 국내 거주한 40세 이상의 국민으로 규정했습니다. 또 이번 선거부터는 대통령 후보로 나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당의 공천을 받아야 했는데 후보로는 총 7명이 등록했습니다. 먼저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박정희가 후보로 나섰고, 야당에서는 민정당의 윤보선, 국민의당의 허정, 자유민주당의 송요찬, 추풍회의 오재영, 정민회의 변영태, 신흥당의 장이석 등 7명이 입후보하였습니다.
제5대 대선 선거홍보 포스터
이번 선거는 군복을 벗고 민간인으로 나온 박정희와 제2공화국 당시 대통령이던 윤보선의 대결로 압축되었는데 결국 군정과 민정의 대결이었습니다. 야당의 주요 후보자들 중에 허정과 송요찬은 후보단일화를 위해 결국 사퇴했지만 변영태 후보를 비롯한 나머지 오재영, 장이석 후보 등은 끝까지 완주했습니다. 사실 변영태 후보도 원래는 군정종식을 위해 결국 사퇴할 생각이었으나 야당의 후보 단일화를 막기 위한 중앙정보부의 편지공작에 마음이 흔들려 결국 사퇴하지 않았다고합니다.
제5대 대선 후보자 (박정희, 윤보선) 홍보물
또 이번선거의 주요 특새으로 사상논쟁을 들수 있는데 이는 박정희와 윤보선이 서로를 '가식적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대결'로 몰아갔고, 윤보선은 박정희의 해방정국에서의 남로당 경력과 여순반란 사건에 가담한 여부 등을 문제삼는 색깔론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박정희 시대의 시작을 가져온 제5대 대통령선거는 매우 근소한 차이로 군정을 대표하는 박정희 후보의 당선으로 끝이 납니다. 박정희후보는 46.6%를 득표했고 이는 윤보선 후보의 득표(45.1%)와 불과 15만표 차이 밖에 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제5대 대통령선거는 옷을 갈아입은 군부의 승리로 끝나 박정희의 제3공화국이 시작됩니다.